[전진우 칼럼]MK의 비극

  • 입력 2006년 4월 29일 03시 05분


손바닥에 땀이 난다고 했다. 정주영 회장 시절 회장실에 불려 들어갔던 현대 사람들 얘기다. 그룹사장단 회의 분위기도 그랬다. ‘왕(王)회장’의 카리스마가 회의를 주도하고 지배했다. ‘왕회장’의 결정에 섣불리 토를 달았다가는 대번에 질책이 날아든다. “이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해 보지도 않고 바보같이.”

그러던 ‘왕회장’도 세월은 이겨 내지 못했다. 2000년 봄 현대가(家)에 ‘왕자의 난(亂)’이 터졌다. 그룹을 총괄하는 회장 자리를 놓고 2남 몽구(장남인 몽필 씨가 1982년 교통사고로 숨져 실질적으로는 장남) 씨와 5남 몽헌 씨가 서로 ‘왕회장’의 재가를 받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오전에는 둘째 아들이, 오후에는 다섯째 아들이 제각각 아버지의 허락을 받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무렵 노환(老患)에 시달리던 ‘왕회장’의 정신은 그렇게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최종 결론은 몽헌 씨의 승리였다. 몽구 씨는 대신 현대차를 이끌고 그룹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저돌적으로 현대차를 이끌고 키웠다. 과거 현대그룹의 영화(榮華)는 사라지고 그가 이끄는 현대차그룹이 재계 서열 2위로 부상했다. 그는 국내시장을 석권하고 미국 중국 체코 터키 인도 등지에 현지공장을 세우는 등 글로벌 경영의 선두주자가 됐다. 어느새 그의 이름 영문 이니셜 MK에는 한국 경제를 이끄는 기업가의 무게가 실렸다. 동생에게 현대그룹 회장 자리를 물려줘야 했던 지난날의 쓰라림은 오히려 복이 된 셈이다.

하지만 MK는 아버지의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을 만큼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는 걸 가볍게 여긴 듯하다. 그는 아버지의 카리스마를 복제(複製)했다. ‘원 맨 시스템’으로 그룹을 통제하고 지배했다. 지난해에만 부사장급 이상 인사를 11차례나 했고, 등기이사로 선임된 최고경영자급 인사도 5명이나 임기 전에 짐을 쌌다고 한다. 이 같은 ‘럭비공 인사’에서 내부 불만이 쌓이지 않는다면 이상한 노릇이다.

물론 MK의 리더십이 현대차가 세계적 메이커로 급성장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는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신속하고 과감한 투자와 강력한 추진력은 전문경영인이 하기 어려운 오너 체제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의사결정이 총수 1인의 맨투맨 방식으로 이뤄지는 ‘멀티(Multi)-단선 조직’에는 효율성 못지않은 리스크가 따른다. 하물며 아무도 ‘노(No)’라고 말하지 못하는 ‘황제(皇帝) 체제’에서는 위기 경보(警報) 채널마저 먹통이 되기 십상이다.

결국 지난날의 아버지 식 카리스마와 아버지 시대의 불투명한 경영 관행, 거기에 편법으로라도 하루빨리 외아들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고 싶은 조바심이 맞물린 것이 MK의 ‘원초적 비극’이 아니겠는가.

검찰은 MK가 2002년부터 올해 초까지 현대차와 기아차, 글로비스 등 그룹 내 6개 계열사를 통해 1000여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3000여억 원은 업무상 배임혐의라고 했다. 그만큼 회사와 주주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다. 그러니 사회에 1조 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내놓겠다고 해도 박수를 받을 리가 없다. 더 우려되는 것은 현대차의 브랜드 이미지 추락과 그에 따른 손실이다. 투명성이 신뢰를 낳고, 신뢰야말로 세계화시대의 국제경쟁력이다.

검찰은 현대차가 ‘MK 1인 기업’은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도 꼭 맞는 건 아니다. 그것이 오랜 우리의 재벌문화이며,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압축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제 그 틀과 그릇된 관행에서 벗어나야 하고,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41억 원의 로비자금으로 550억 원의 부채를 탕감 받을 수 있는 정치권력-관료-재벌의 먹이사슬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경제 정의(正義)’란 검찰의 그럴싸한 브리핑 제목에 그칠지 모른다. 검찰은 푼돈(?) 먹고 막대한 국민혈세를 축낸 자들을 반드시 잡아내야 한다. 그것은 현대차그룹 사람들이 ‘MK의 비극’을 극복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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