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시계와 나침반

  • 입력 2006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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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열렸던 정부의 정책홍보토론회 보도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끈다. 선거 패배 때문인지 노무현 대통령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그 뒤쪽 대형 스크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시계보다는 나침반을 보라. 시간처럼 그냥 가는 것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가 더 중요.’ 중고교 교실의 급훈 같은 이 문장은 지금 이 정부가 처해 있는 어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듯하다.

시계보다 나침반을 보라니, 무한경쟁의 세상에 긴장하고 있는 정부라면 시계와 달력도 자주 보자고 했어야 옳다. 온 세계가 촌각을 다투면서 앞을 향해 달려가는데 우리만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며 과거지사에 매달렸던 결과가 어떠했는지 보라. 일본이 활기를 되찾고 중국이 맹렬하게 뛰는 동안 그 시끄럽던 역사 논쟁과 이념 논쟁은 과연 국가경제를 성장시켰고 가계소득을 높여 주었는가. 참여정부 출범 이후 우리의 역사는 ‘잃어버린 3년 반’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대통령의 선출은 희망을 안겨 준다. 당선자 측은 마치 잘 깎은 연필과 새 공책을 갖고 학교에 가는 입학식 날의 신입생 기분이다.”(허버트 스타인 ‘대통령의 경제학’) 꿈같은 얘기지만 참여정부에도 그런 시절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졸업까지 남은 시간이 훨씬 짧아진 지금 참여정부가 받은 중간 성적표는 (그간의 학교생활로 미루어 예상은 했지만) 보기에도 참담한 낙제점이었다.

성적이 너무 나쁠 때는 학생을 닦달하거나 조롱하기보다 좌절하지 않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제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는 학생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가장 대책 없는 ‘문제아’는 점수가 형편없는 이유를 선생이 괴상한 문제를 냈다거나 채점을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고집 부리는 학생이다. 선거 후 열흘이 더 지났는데 일부 대통령 측근과 정부 인사들은 아직도 ‘국민의 의식 수준이 낮아 정책을 이해 못하는 것이니까 의지를 갖고 변함없이 추진하겠다’는 식이다.

생로병사가 피할 수 없는 세상사라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늙는 것은 중요하다. 업적을 쌓으며 곱게 늙는 정권은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규정한 ‘독선과 아집’, 바로 그것을 얼굴에 새기며 늙어 가는 정권은 국민을 피곤하게 만든다. 참여정부는 어느 쪽인가. 시계는 안 보더라도 거울은 한번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남은 임기 동안 어떻게 늙어 가야 하는지를 배우기 바란다.

나침반을 보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나침반이란 올바른 목적지로 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목적지가 잘못 표시된 지도에는 나침반의 역할이 무의미해진다. 황폐하고 위험한 무인도로 향하면서 그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 발전을 꾀한다며 좌파성 정책을 펴는 것이 그런 사례다. 그것은 마치 산삼을 캔다며 모래사장을 헤매는 심마니와 같은 모습이다.

특히 집권세력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국민이 원하는 방향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일이다. 남쪽 국민과 북쪽 지도자의 견해가 다를 때 정부가 눈을 돌려야 할 방향은 당연히 남쪽이다. 좌회전 전용 방향타를 갖고 있는 배는 국민이 원하는 목적지에서 계속 멀어지기만 한다.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근본 원인은 바로 양쪽 간의 그 엄청난 ‘방향각 차이’ 때문이었다. 뜨거운 맛을 직접 본 여당이 선거 후 비교적 민심을 바르게 읽고 있지만 정부 관리들은 ‘방향’에 관한 한 여전히 ‘독선과 아집’을 실증하고 있다.

정책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는 많이 나아갈수록 바로잡기 어렵고 낭비도 더하다. 참여정부의 경제 외교안보 정책 가운데는 정상궤도를 벗어난 것이 많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헌법만큼 고치기 힘들 것”이라는 대통령 최측근 참모의 자랑처럼 정책의 방향 수정이 어렵다면 이 정권에 대한 국민의 원성은 임기 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정부로서는 고장 난 나침반보다 임기의 타임아웃을 향해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보면서 국민이 정치적으로 동의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서둘러 바로잡아야 할 때다. ‘졸업반 성적표’는 퇴임 후 전직 대통령을 평가하는 꼬리표로 영원히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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