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선 구두가 패션 매장의 주인공으로 등극했고, 한국판 ‘디자이너 슈즈’가 전성기를 맞았다. 그래서일까. 최근 구두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연이어 열려 화제다.
주한이탈리아문화원과 현대백화점이 마련한 ‘걷는 예술’은 이탈리아 신발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회. 다음 달 9일까지 현대백화점 주요 점포에서 순회 전시된다.
또 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이벤트 형식으로 열린 스와로브스키의 구두 전시회는 크리스털로 ‘화장’한 신발을 대거 선보여 슈어홀릭의 마음을 흔들었다.
‘걷는 예술’을 기획한 큐레이터 루치아노 칼로소 씨는 “구두는 과학이자 예술”이라며 “대량 생산된 중저가 신발이 넘쳐 나지만 엄격한 공정을 거친 수제 구두는 여전히 여성들을 유혹한다”고 말했다.
○ 구두는 예술이다
올여름엔 지저스 샌들(끈으로 된 굽 낮은 샌들)이 유행했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 유행했던 신발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대 로마시대 패션이 현대에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걷는 예술’에 전시된 150여 켤레의 구두를 보면 고대 로마인이 즐겨 신던 지저스 샌들에서 ‘원조’ 하이힐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구두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150여 켤레의 작품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구두 생산업체 ‘로시모다’와 ‘아르디티’가 제공했다.
로시모다는 크리스티앙 라크루아, 지방시, 도나카란, 셀린느 등 고급 패션하우스의 신발을 생산하는 곳. 고급 수제화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인 셈이다. 아르디티는 발레, 오페라, 영화에 쓰이는 신발을 제작한 노하우로 수백 년 전 구두를 재현했다.
전시회를 둘러보면 왜 이탈리아 구두가 ‘예술’로 평가받는지 알 수 있다.
칼로소 씨는 “제대로 된 이탈리아 구두 하나를 만들려면 200가지 공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상당수 공정이 기계화됐지만 기계 하나에 10여 명이 달라붙어 제품 상태를 꼼꼼히 살핀다고 한다.
여전히 엄격한 공정을 유지하는 곳도 많다.
구두 브랜드 ‘아테스토니’는 168가지 공정을 거치는 볼로냐 공법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볼로냐는 13세기부터 고급 구두를 생산해 온 도시.
아테스토니는 신발 밑창에 ‘공기주머니’를 삽입해 발가락이 신발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했다. 걸을 땐 신발이 늘어나고 멈추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는 게 회사 측 설명.
16세기 말에는 물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고안된 하이힐이 등장했다.
메릴린 먼로는 “모든 여성은 하이힐을 발명한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이 여성의 다리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리라. 20세기 초 여성의 치마 길이가 짧아지면서 하이힐은 당당히 구두 패션의 총아로 승격됐다.
크리스털 슈즈 전시회를 기획한 스와로브스키 관계자는 “여성들이 아름다운 신발을 보고 느끼는 욕심에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면서 “멋진 구두를 신는 것은 관능과 우아함이 공존함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 이탈리아 추월 꿈꾸는 한국 슈즈
문학이나 영화에서 구두는 욕망의 상징으로 묘사되곤 한다. 동화 ‘빨간 구두’, 영화 ‘분홍신’의 여주인공들은 아름다운 신발에 현혹돼(욕망을 이기지 못해) 불행을 겪는다.
슈어홀릭이 국내에 등장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를 통해 슈어홀릭의 존재가 알려지고, 청바지가 유행하면서 신발이 ‘튀는 패션’을 만드는 주역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국내 슈어홀릭들은 이탈리아 뺨치는 한국판 디자이너 슈즈의 시대를 열었다. 디자이너 이보현 씨의 수콤마보니, 최정인 이지현 씨의 지클로제, 권현정 씨의 플라비아 케이 등이 대표적인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다.
강남구 청담동의 작은 구둣방에서 시작한 이들 브랜드는 슈어홀릭의 입소문으로 성장해 이제는 고급 이탈리아 구두와 당당히 겨룬다. 30만∼40만 원대의 비싼 값에도 인기가 높다.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 웨스트의 구두담당 이정우 대리는 “구두가 더는 1층 잡화매장에 머물지 않고, 패션 매장의 명당을 차지하고 있다”며 “한국의 디자이너 슈즈는 독특한 브랜드 콘셉트와 디자인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번에 여섯 켤레를 충동 구매하는 슈어홀릭도 있다”면서 “한국의 디자이너 슈즈는 동양인의 발에 잘 맞는다는 강점을 내세워 일본과 대만의 슈어홀릭도 공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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