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3>

  • 입력 2009년 1월 7일 02시 59분


오 천사여! 잠은 오감을 쉬게 하고 사랑은 오감을 춤추게 한다네.

사방이 온통 푸른 잔물결이다.

이륙과 동시에 잠과 사랑에 관한 잠언을 깔며 에인절(Angel)이 작동되었다. 헤드셋을 쓰고 눈을 감자 스크린이 나타났다. 재작년까지는 명령어를 읊는 방식이라서 옆 좌석 승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일이 잦았다. 작년 봄, 헤드셋에 감지되는 뇌파만으로 브레인 마우스(Brain Mouse)를 움직이는 시스템이 선을 보였다.

‘바다’를 클릭하자 기내가 푸른빛으로 바뀌면서 갈매기 울음이 들려왔다.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다양한 바다로 넘실거렸다.

‘제주 바다’에 눈을 맞추니 섬 하나 없는 수평선이 펼쳐졌다.

사내는 두 달 전 진숙과 함께 다녀온 제주도 김녕굴을 떠올렸다. 굴의 생김새가 뱀을 닮았다고 하여 사굴(蛇窟)로도 불렸다. 흘러내린 용암의 흔적을 따라서 동굴을 거니는 동안, 사내는 행복에 겨워 눈물을 쏟았다. 오래전 떠난 고향의 품에 안긴 듯했다.

반드시 돌아오리라!

진숙이 죽었으니 당분간은 유전형질연구소의 경비가 더욱 삼엄할 것이다. 그러나 은초롱뱀은 포기하기 힘든 목표였다. 코브라의 92배 맹독을 내뿜는 독사의 눈초리는 얼마나 날카로울까. 또 그 비늘은 얼마나 차갑고 촘촘할까. 밀매시장에 내다팔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싸겠지만, 사내는 타인에게 은초롱뱀을 넘길 뜻이 없었다. 최고의 독사와 함께 늙어가는 것, 그것이 사내의 인생 목표였다.

배경 음악을 따로 고르진 않았다. 파도와 바닷새들의 천연음에 젖어 잠시 눈을 붙일 작정이었다. ‘저물 무렵’으로 몰입시각을 정했다. 피곤이 밀려들었다.

수평선 위로 희끄무레한 물체가 두둥실 떠왔다. 처음엔 구름이라고 여겼고 그 다음엔 갈매기려니 했다. 제주바다를 건너온 것은 흰 원피스 차림의 진숙이었다.

“여긴…… 너무 추워.”

그녀가 쑥 다가왔다. 싸늘한 입김이 그의 뺨에 닿았다.

“넌 없어. 죽었다고!”

“사랑해. 안아줘.”

가슴을 이마로 톡톡 치며 오른팔을 들었다. 잘려나간 팔꿈치에서 검붉은 피가 그의 얼굴로 풍풍 뿜어 나왔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깼다. 악몽이었다.

그때부터 헛기침을 하고 다리를 바꿔 꼬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호텔에서 체크아웃 직전에 먹은 비빔밥이 말썽이었을까. ‘산나물에 뱀을 갈아 섞은 별미’란 메뉴판을 읽지만 않았어도, 서울 음식에 손을 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뱀과 관련한 일이라면 직접 겪어야 직성이 풀렸다. 독성을 시험하기 위해 해독 캡슐을 오른손에 쥐고 왼 팔목에 까치살모사의 송곳니를 들이댄 적도 있고, 옥죔의 강도를 측정하기 위해 비단구렁이의 똬리 속에 몸을 낀 적도 있었다.

헤드셋을 벗고 일어섰다.

화장실에서 아랫배를 쓸어내리는 동안, 사내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뱀! 당신이 온몸으로 기기 전 하늘을 날았다는 전설을, 나는 믿어요 / 당신을 사랑한 피그미침팬지들이 꽃잎처럼…… 흩날렸죠? 나부꼈죠? 떨어졌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사를 잊은 것이다. 좌측 벽에 스크린이 자동으로 켜지고 타자를 치듯 글자들이 떴다.

‘스미스 님! 다윈과 핀치들의 데뷔곡 <적자생존(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을 좋아하시는군요. 2037년 화성에서 녹음한 원곡을 들으시겠습니까?’

사내가 브레인 마우스를 클릭한 후 헤드셋을 다시 썼다. 4인조 밴드의 노래가 이어졌다. 사내도 흥겹게 따라 불렀다.

“뱀! 당신의 키스는 달콤했지요. 당신의 혀가 목구멍 깊숙이 들어올 때 / 당신의 꼬리가 몸 구석구석을 수놓을 때 / 그리하여 피그미침팬지들이 점점 당신을 닮아갈 때 당신처럼 날름거리고 당신처럼 사랑할 때 / 그때, 그때, 우리의 창세기가 완성될 때!”

엉덩이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불순물 제거와 동시에 습식 엉덩이 안마를 시작한 것이다. 엉덩이에 신경을 집중했다.

사내는 진숙과의 섹스가 한창일 때도 엉덩이를 어루만져 달라고 했다. 자꾸 아랫배를 건드리자, 사내는 “뒤, 뒤, 뒤, 뒤를 좀 더! 멍청아, 뒤!”라고 외쳤다. 성감대를 확인하고 개발하는 소프트웨어가 판매된 지도 오래였다. 사내는 촉감 증진 알약을 구입하지는 않았다. 엉덩이만으로도 충분해. 암, 그렇고 말고!

습식 안마가 끝나자 스크린에 새로운 문장이 떴다.

‘HOT MOOD(핫 무드)로 넘어가시겠습니까?’

여기서부터는 유료서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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