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10>선교사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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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19일 03시 00분


“조선의 계몽 위해” 학교-병원 세워 변화의 씨앗 심어

1932년 4월 4일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 감리교 초기 선교사로 활동한 노블 부부의 선교 40주년 기념회 소식.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32년 4월 4일 동아일보에 실린 한국 감리교 초기 선교사로 활동한 노블 부부의 선교 40주년 기념회 소식. 동아일보 자료 사진
《“연희전문학교와 세부란스의학전문학교를 위하야 각 일백오십만 ‘딸라’의 자금을 모집하려 미국으로 건너간 ‘어비슨’ 씨와 ‘언더우드’ 량씨는 자금모집에 로력한 결과 목!한 금액의 약 반액이 것치엇슴으로…목!한 금액이 다 것치게 되면 조선 돈으로 륙백만원을 자금으로 연희전문학교 세부란스의학전문학교를 합하야 대학으로 승격식히고 또한 협성신학교도 종합대학문과에 편입케하리라더라.” ― 동아일보 1925년 12월 2일자》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선교사들은 이 땅에 종교만 전파한 것이 아니다. 남녀평등 사상, 근대교육, 서양의학과 같은 서구문물을 전파하며 변화의 씨앗을 뿌렸다.

선교사의 사업 가운데 학교설립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1885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헨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우고 한글 장려운동을 펼쳤고, 그와 함께 입국한 호러스 언더우드는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고 기독청년회(YMCA)도 조직했다. 1887년 언더우드의 사랑방에 14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은 ‘새문안교회’의 시초가 됐다.

1932년 12월 1일 동아일보는 외국인 선교사의 활약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숭실학교 창립 당시 미국에서 자긔 재산을 가저다가 교사 건축에 제공하엿다. 조선옷을 입고 당나귀를 타고 다니며 조선민족의 게몽을 위하야 헌신한 것은 영원히 남은 유쾌사라한다.” 48년간 한국에 머문 스왈른 선교사의 이야기다.

선교사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문맹률이 높았던 여성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1886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웠다. 동아일보에는 1935년 1월 18일 여성에게 교육을 통한 자립 기회를 주려 한 선교회의 활동 기사가 실렸다. “가련한 여성들에게 지식을 주고 직업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야 경남 동래읍에 호주 선교회에서 동명여자실수학원을 세운다고 한다. 실업부를 두어서 농업, 축산, 가사 등에 관한 실제 지식을 교수하야 졸업 후 자립적 생활을 충분히 하도록 지도하리라 한다.”

선교사들은 조선인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교육하는 데에 힘썼다. 주일학교, 부녀자 교육을 통한 선교사들의 한글 교육은 문맹률을 낮추는 역할을 했다. 선교사가 만든 병원은 서양식 의술로 조선인을 치료했다. 1884년 의료 선교사로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 앨런은 왕실의 어의(御醫)로 활동하다가 병원 설립 허가를 받아 1885년 광혜원을 만들었다. 광혜원은 이후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종교 인구는 2005년 현재 2497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기독교 신자가 861만6438명, 천주교 신자는 514만6147명이다. 연세대 설립자이자 초창기 외국인 선교사로 한국의 교육, 종교, 사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언더우드 일가는 입국 119년 만인 2004년 한국을 떠났다. 이제는 한국의 선교사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활발한 종교 활동과 사회 운동을 펼치며 그 땅에 변화의 씨앗을 심어 주고 있다.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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