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기가 구석구석 온 몸으로 스며들 때/누구인들 한번쯤 이렇게 푹 젖다보면/사나흘 생각이 깊어 돌아갈 수 없는 거다//고추 마늘 온갖 양념을 한 통속에 비벼서/덥고 춥고 맵고 짠 맛을 한꺼번에 겪는 것/세상의 눈치 살피며 풀 죽을 수 있는 거다//입 안에서 씹힐 때 마지막 숨 거두며/다섯 번을 죽어서야 맛을 내는 배추처럼/몇 번을 까무러쳐야 시 한편이 되는 거다’ <김삼환의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에서>
한때 역대 정권을 김치에 비유한 우스갯소리가 시중에 떠돈 적이 있다. ‘박정희 정권은 보쌈김치, 전두환 정권은 깍두기김치, 노태우 정권은 물김치, 김영삼(YS) 정권은 파김치, 김대중(DJ) 정권은 나박김치, 노무현 정권은 겉절이’라는 것이다.
보쌈김치는 정권에 대드는 사람들을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 보쌈 싸듯이 데려다가 치도곤한 것을 비유한 것이고, 깍두기는 조직폭력배의 깍두기머리를 상징한 것이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었던 6공화국 물태우 정권을 빗대어 물김치라 했고, 외환위기를 부른 YS 정권은 자연스럽게 파김치가 됐다.
DJP 연합으로 출범한 DJ 정권은 김치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김치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정체성 때문에 나박김치라고 했으리라. 겉절이야 설익은 사람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입으로만 설치는 것을 풍자한 것일 거다.
그렇다. 김치는 ‘절임채소에 양념을 섞어 숙성한 발효식품’을 말한다. 절이지 않으면 김치가 아니다. 겉절이는 ‘김치 맛을 내는 무침’일 뿐이다. 발효과정이 없는 ‘일본 기무치’도 겉절이나 마찬가지다. 채소를 절여 숙성시키면 모두 다 김치다.
무를 나박나박 썬 나박김치, 깍둑깍둑 썬 깍두기, 무와 배추가 섞인 섞박지, 칼칼한 국물에 온갖 양념 보쌈김치, 콧잔등 찡하게 맵고 시원한 총각김치, 혀끝에 쓴맛 살짝 걸치는 고들빼기김치, 바다 냄새 물씬 짭조름한 생굴김치. 아이들 즐겨 먹는 순한 백김치. 새콤달콤 오이나박김치. 곰삭은 게장 맛 묵은 지. 동지섣달 밤 사르락 사르락 격자문 창호지에 눈발 부딪칠 때, 메밀묵과 함께 먹는 살얼음 동치미국물….
배추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햇볕을 듬뿍 쬔다. 뒤집힌 ‘느티나무 풀’이라고나 할까. 무는 그 튼실한 허벅지를 어두운 땅속에 쑤욱∼ 박는다. 달밤 억새밭에서, 급히 “쉬∼” 하고 있는 아줌마의 흐벅진 엉덩이 같다.
배추가 해바라기라면, 무는 달맞이꽃이다. 배추는 양이고, 무는 음이다. 몸이 더운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김치를 찾는다. 손발이 찬 사람은 저절로 배추김치에 손이 간다. 한국 사람들은 무와 배추를 온갖 양념에 버무려 김치라는 오묘한 음식을 만들어냈다. 김치는 천지인(天地人), 곧 하늘 땅 사람의 조화물인 것이다.
김치는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맵지 않고 싱겁다. 국물도 많다. 무나 배추도 크고 두께두께 썬다. 황해도나 평안도 김치는 슴슴하고 시원하다. 고춧가루 등 갖은 양념을 거의 쓰지 않아 담백하고 소박하다. 남쪽 김치는 짜고 맵고 국물이 없는 편이다. 더운 지방일수록 땀을 많이 흘려서 소금섭취가 많다. 게다가 오래 보관하려면 간간해야 한다.
전라도 김치는 화려하다. 온갖 양념이 다 들어가 걸쭉하다. 젓갈도 멸치젓, 조기젓, 새우젓, 황석어젓, 갈치젓, 까나리젓, 대구아가미젓 등 가지각색이다. 보통 찹쌀 죽을 돌확에 갈아 넣어 풋내를 가시게 하고 감칠맛을 낸다. 한여름 열무김치를 담글 때도 반드시 찰밥을 짓이겨 넣는다. 그래야 칼칼하고 시원하고 들척지근하다.
김치는 이 세상 모든 음식의 감초다. 죽었던 맛도 김치가 들어가는 순간 화르르 살아난다. 김치김밥, 김치라면, 김치찌개, 김치버거, 김치피자, 김치샌드위치, 김치샐러드, 김치케이크, 김치주스, 김치볶음밥, 김치말이국밥, 김치볼스파게티, 동치미단호박국수말이, 김치장떡, 김치냉채, 김치두부두루치기, 김치표고버섯찜, 김치묵무침, 김치비빔국수, 김치만두, 백김치초밥….
그뿐인가. 칼국수 집의 김치가 맛이 없으면, 그 집은 파리 날리기 십상이다. 설렁탕엔 깍두기가 제격이다. 아삭아삭 씹는 순간, 설렁탕의 누린내와 느끼한 맛이 금세 사라진다. 어릴 적 술래잡기놀이 할 때 ‘깍두기 역할’이 떠오른다.
삼겹살과 묵은 지를 함께 구워 먹는 맛은 또 어떤가. 김치 한 보시기에 막걸리 한 사발 쭈욱∼ 들이켜도 그만이다. 김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에 가닥김치 얹어 먹은 뒤, 시원한 동치미국물 마시는 맛은 생각만 해도 입 안에 침이 흥건하다. 기름 자르르 고봉흰쌀밥에 김치 한 가닥 쭈욱 찢어 걸쳐먹는 것도 그렇다. ‘내게도 시퍼렇던 잎이며 줄기 참대같이 푸르던 날이 있었더니라 그 빳빳하던 사지를 소금에 절이고 절여 인고와 시련의 고춧가루 버무리고 사랑과 눈물의 파 마늘 양념으로 뼈까지 녹여 일생을 마쳤다’ <홍윤숙 ‘묵은 김치 사설(辭說)’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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