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김선경(가명·36·여) 씨는 길을 걷던 중 안구가 튀어나오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동네 안과에서 안구를 다시 집어넣었는데 며칠 후에는 코피가 쏟아지고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됐다. 동네 이비인후과는 축농증 수술을 권했다.
한 달이 지났다. 김 씨는 지방의 종합병원 이비인후과에서 코와 뇌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의사는 “3년 생존율이 1%도 되지 않는 뇌종양이다. 우리 병원에선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김 씨는 국내 병원에서 뇌종양 치료 경험이 가장 많다고 알려진 서울대병원 뇌척추종양센터로 달려갔다. MRI 판독을 마친 치료팀은 ‘신경모세포종’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김 씨의 뇌 아래쪽에선 골수에서 전이된 악성 암세포가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신경외과 이비인후과 종양내과 영상의학과 전문의로 구성된 치료팀은 10시간 수술 끝에 이 종양을 제거했다. 암세포가 자랄 확률이 큰 뇌 아래 부위에는 방사선 치료를 병행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올 11월, 김 씨는 ‘완치’ 통보를 받았다. 치료팀이 분석한 뇌종양 특성과 치료법은 곧 세계신경외과학회 저널인 ‘세계신경외과학’에 실릴 예정이다.
○ 다른 병원이 포기한 말기 암도 수술
암세포가 뇌나 척수에 전이되면 많은 환자가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현실이다. 수술을 해도 재발 확률이 높은 데다 수술 후유증으로 신체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울대병원 치료팀은 난도가 높은 수술에 계속 도전하고 있다. 2006년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고선아(가명·47·여) 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고 씨는 폐암 세포가 뇌로 전이된 상태였다. 서울에 있는 한 대학병원은 “6개월 이상 살기 어렵다”는 ‘시한부 선고’를 내렸다. 그래도 고 씨는 종양제거수술을 받았다. 이어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암과의 투병은 이제 시작이었다.
고 씨의 전이성 뇌암은 서울대병원에서도 여덟 번 재발했다. 치료팀은 올 3월 두개골을 다시 열고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잘됐지만 3개월 후인 6월, 소뇌 부근에서 또 암세포가 발견됐다.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이처럼 수술과 치료가 반복됐지만 고 씨 삶의 질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5년이 흘렀다. 요즘 고 씨는 뛰는 것을 빼고는 대부분의 운동을 잘 소화하고 있다.
고 씨의 방사선 치료를 담당한 신경외과 백선하 교수는 “암세포가 발견된 부위에 방사선을 조금씩 자주 쬐고 약물치료와 재활치료를 병행했다”며 “협진이 아니면 고 씨의 생존율을 올리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수술은 최대한 정교하게
뇌척추종양센터에 찾아오는 환자의 4분의 1은 간암 세포가 뇌나 척추로 전이된 중증 암 환자이다. 이미 다른 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수술이 정교하지 않으면 환자는 치명적인 신체 손상을 입는다. 이를테면 수술 도중 척수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하반신이 마비되고 운동능력을 잃게 된다.
분초를 다투는 중증 환자를 수술할 때는 의사의 풍부한 임상경험이 도움을 준다. 미세현미경과 정교함을 높인 MRI 장비도 큰 도움이 된다.
간암 세포가 척수 근처로 침투해 하반신이 마비됐던 이세풍 씨(34)는 지난달 종양을 떼어 내는 수술을 받았다. 치료팀은 미세현미경으로 척수 부근의 혈관을 수시로 확인하며 14시간 만에 수술을 끝냈다. 수술을 마친 이 씨는 걸어서 집으로 갔다.
간암이 척추로 침투한 뒤 하지 마비가 생긴 환자들을 치료팀이 분석한 결과 68%가 수술 후 걸을 수 있었다. 특히 하지 마비가 발생한 지 3일 이내 치료를 받았고 누워서 다리를 들 수 있는 정도의 힘이 남아 있던 환자는 보행 성공률이 93%였다. 이 같은 치료 결과는 지난해 북미척추학회에서 발표됐다.
뇌종양을 일으키는 미세혈관은 일반적인 MRI로도 찍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악성 종양인 교모세포종은 정상 세포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 MRI는 자석의 세기(단위는 T·테슬라)가 높을수록 선명도가 높아진다. 현재 이 센터에서 사용하는 MRI는 1.5∼3T이고 연구용으로 가동 중인 것은 7T다. 치료팀은 7T MRI로 종양을 정교하게 판독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뇌 중앙에 깊숙이 자리 잡은 종양은 감마나이프를 활용해 제거한다. 또 치료팀은 미세현미경으로 종양을 살펴보며 수술로 제거할 부분과 방사선 치료로 없앨 수 있는 부분을 구분한 뒤 수술에 들어간다. 수술의 정교함을 높이려는 의도다.
○ 수술 마친 환자들이 보내는 농산물
매년 추석을 앞두고 치료팀의 연구실 앞에는 쌀 배추 등 농산물이 수북이 쌓인다. 이 병원 뇌척추종양센터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택배로 보낸 것이다. 뇌와 척추암 환자 상당수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시골로 내려가 농산물을 직접 키우며 산다고 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농산물은 환자들의 생존 사실을 알려주는 징표다. 농산물이 많이 쌓일수록 치료팀의 보람도 커진다. 백 교수는 “농산물이 올라오면 환자를 돌봤던 치료팀들이 다시 모여 팀워크를 다진다”고 말했다. 신경외과 김치헌 교수는 “환자당 최대 15명의 치료팀이 구성된다”며 “환자 1명이 보낸 농산물이 올라오면 15명이 나눠 갖거나 회식자리를 마련하면서 치료 경험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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