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이기웅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열화당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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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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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농사꾼’으로 살게 해주신 5대조 할아버지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열화당(悅話堂)’은 나의 아호다. 매월당이나 사임당의 경우와 같다. 서울에서 떨어진 강릉에 선교장(船橋莊)을 일으키고 경영하고자 했던 선대의 뜻을 받들어, 나의 5대조이신 오은(鰲隱) 이후(李후) 할아버지는 1815년 열화당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을 지으셨다. 이 당호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한 구절인 ‘온 가족이 한데 모여 기쁘게 이야기 나누며 삶을 영위한다(悅親戚之情話)’에서 따온 것처럼 식구들이 한데 모여 사는 이상적 마을을 꿈꾼 공간이었다. 그저 작고 아담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선교장 식구들이 공동의 뜻을 가꾸면서 인간의 가치를 찾으려는 처소였던 것이다. 그 공간은 이른바 사랑채이지만 기거할 수 있고 집회가 가능하며, 요즘으로 말하면 도서관이요, 출판사인 셈이기도 했다.

의식이 돋을 대여섯 살 때부터, 그리고 건물 주변에서 군불을 때며 심부름하던 일고여덟 살 때부터 이제까지 열화당 공간을 속속들이 살펴 왔기에 남달리 그 공간의 냄새를 짙게 느낀다. 백부이신 경미(鏡湄)께서는 어린 내게 열화당 아궁이에 군불 때는 일을 자주 시키셨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그 일을 시킨 게 예사롭지 않다.

1971년 이 이름을 따 서울에서 현대식 출판사를 차렸다. 오은 할아버지께서 뜻깊은 공간을 설립하신 지 150여 년 만이었다. 강릉 열화당의 역사까지 포함해 2015년이면 꼭 200년이 된다.

서울에서 서른다섯 해 동안 책을 만들었다. 말농사 글농사로 일컫는 출판일을 하며 버티기엔 너무나 척박한 환경이기에 그동안 내가 한 일을 돌이켜 보면 좌충우돌 천방지축으로 점철된 듯해 걱정스럽다. 말과 글을 다루는 출판일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가. “말이 서야 집안이 선다”는 집안 어른의 가르침은 이런 일을 걱정해서일 터이니 말이다. ‘오은 할아버지, 이것저것 잘못이 많습니다’ 하고 용서를 빌곤 한다. 용서 비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데, 그 어른이 열화당과 비슷한 시기에 지으신 활래정(活來亭)이다. 선교장에 가면 잠자는 곳이 활래정 온돌방으로 정해져 있다. 잠든 나는 그곳에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하신 어른들을 뵙는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 그리고 오은 할아버지를 만난다. 그분들 앞에서 책농사꾼으로서의 마음을 가다듬고 옷깃을 여민다.

2004년 파주에 열화당 새 건물을 마련했다. 출판계가 뜻을 모아 세운 출판도시에 자리 잡았다. 새 열화당 건물을 영국 목수에게 맡기고 ‘도서관 도시’라는 출판도시의 지향점에 걸맞은 공간을 건물에 도입하도록 주문했다. 건축가는 주문대로 ‘도서관+책방’이라는 복합공간을 설계하고자 애썼다. 내가 구상한 공간은 평생을 모아 온 나의 소장본과 열화당 편집부 장서 및 자료를 선별해 소장함으로써 나를 비롯한 열화당 직원들은 물론이고 출판도시에서 일하는 모든 이에게, 더 넓게는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도서관처럼 열람할 수 있게 하며, 소유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살 수 있는 책방이 되기도 한다. 다만 도서관이기도 하므로, 재구매가 가능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는 책만 판매가 가능하다. 이 공간은 나의 공부방이자 편집부의 자료실이자 출판도시 모든 이들의 서점이요, 도서관이다. 책이 자칫 경직되거나 상업주의에 매몰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개념이다.

이 공간 한쪽에 벽감(壁龕)을 마련하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사람들을 모셨다. 사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선교장 사람들의 작은 얼굴사진 액자를 진열해 놓았고, 다른 한쪽에는 오늘의 열화당을 있게 한 책의 저자들 얼굴사진 액자를 진열해 놓았다. 모두가 고인이므로 이 공간을 찾는 이들은 특별한 느낌으로 책을 생각하게 된다. 책을 다루는 모든 이에게 남다른 소명의 생각을 일깨운다. 이곳을 찾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대화가 가능케 한다.

강릉 열화당에서 서울 열화당을 거쳐 파주 열화당에 이르는 시공간의 이동 축은 매우 길어 보이지만 오은 할아버지의 입김이 이 공간에 서려 있다. 200년 전의 열화당이 지금 파주에 와 있으며, 오늘 열화당 발행인이란 직분은 오은 할아버지가 내리신 벼슬이다.

이기웅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열화당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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