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들으니 그냥 생각났다. 하도 많이 춰서 몸이 기억하고 있는 동작들. 하루 만에 안무(按舞)를 다 짜버렸다.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 한 시대를 휘저었던 몸짓과 마주한 걸그룹 티아라 멤버들은 조금 당혹했다. 사흘 전 “1970년대 디스코가 콘셉트야. 도와줘”라며 걸어온 옛 춤 친구의 전화. 디스코라…. 손은 어떻게 뻗고, 스텝은 어떻게 밟아야 할지 훤했다. 마무리는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1977년)를 패러디해 줄을 맞춰 차례로 몸을 돌리면서 손을 하늘로 내찌르기. 지난해 여름, 노래 ‘롤리폴리’의 율동은 그렇게 모양새를 갖췄다. 한국 뮤지컬 안무의 일인자 서병구(50)의 몸은 옛 생각으로 짜릿했다.
○ ‘서 트래볼타’
전교생 600명 중 580등. 그러나 서병구는 서라벌고의 우상이었다. 학교 학예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은 그의 춤에 넋이 나갔다. 요즘 아이돌 부럽지 않았다. AFKN(현 AFN·주한미군방송)의 ‘솔트레인’이나 ‘댄스 피버’ 같은 댄스 프로그램에 나온 춤은 고스란히 그의 몸으로 재연됐다. 한번 춤을 보기만 하면 그대로 외워졌다. 공부? 그런 건 몰랐다. 춤이 유일한 낙이었다.
“팝송을 한두 번 들으면 곡의 모든 리듬을 완벽하게 기억했어요. 수업시간에 눈은 칠판을 보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안무를 짰죠.”
‘토요일 밤의 열기’에 담긴 비지스의 ‘스테잉 얼라이브’나 ‘나이트 피버’, 영화 ‘그리스’(1978년)에 나온 올리비아 뉴턴존의 노래들, 그리고 케이시 앤드 더 선샤인 밴드의 명곡 ‘셰이크 유어 부티’ 같은 노래들이 그의 몸과 하나가 됐다.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축구공을 던져주고 자리를 뜨면 그는 친구들과 몰래 건물 뒤로 가서 ‘연구한’ 안무를 전수했다. 교련 선생님에게 걸려 몽둥이찜질을 당하기도 했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꼬여서 몹쓸 것 가르친다고 혼도 났다. 춤을 가르쳐달라고 한 건 그 친구들이었지만 서운할 건 없었다. 그는 당시 세계적인 디스코 스타, 존 트래볼타 뺨치는 ‘서 트래볼타’로 불렸으니까.
그가 아직 제대로 서지도 못하던 두 살 때쯤이었다고 했다.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면 아기 서병구는 방구석으로 기어가서 양쪽 벽 모퉁이에 몸을 기대고 서서는 손발을 허우적댔다. 그런데 안무를 짜놓은 듯 음악이 빨라지면 빨리, 느려지면 천천히 흔들더란다. 초등학교 때 생긴 TV에서 왜 AFKN을 찾아봤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잭슨 파이브 쇼’에서 본 마이클 잭슨과 그 형제들의 율동, ‘도니 앤드 마리 쇼’에서 본 오스먼드 남매의 동작들을 춤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따라했다. 국악을 하던 큰어머니의 눈에 띄어 한국무용을 몇 개월 배워 보기도 했다. 중학교 때 1년가량 더 배우다 “남자가 무슨 춤이냐”는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 접었다. 그래도 그의 충실한 무용교사 AFKN은 항상 ‘온(on)’이었다.
문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들어간다는 게 무리인 그의 성적이었다. 이리저리 궁리하다 입시전형 자료의 ‘경희대 무용과 모집·남자 포함’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옳다구나. 성적도 얼추 맞추겠고, 한국무용을 한 적도 있다. 무엇보다 춤이지 않은가. 아버지를 일주일간 설득해 동네의 한국무용학원을 찾았다. 실력을 미심쩍어하던 원장 선생은 장구의 빠른 장단에 맞춰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몸을 수십 차례 회전하며, 앉았다 일어섰다 즉흥적으로 춤을 춰대는 그를 원생으로 받아들였다. 시험까지 남은 두 달, 학원에서 합숙하다시피 하며 하루 15시간 이상 춤을 췄다. 연습이 끝나면 버스 계단에 발을 올리지 못할 만큼 녹초가 되는 날이 반복된 뒤 그는 경희대 무용과에 합격했다. 52명 중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 그리고 밥 포시
서병구는 1991년 뮤지컬 ‘캐츠’의 재공연 안무를 맡은 이래 어린이·창작·번역 뮤지컬을 비롯해 마당극, 악극(樂劇)까지 200여 편의 안무를 맡았다. 최초로 뉴욕에 진출한 ‘명성황후’도 그가 안무를 맡았고,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북유럽의 뮤지컬도 그의 손에서 다시 태어났다. “실력보다 운이 좋았어요. 옛날에 점쟁이가 ‘당신은 20%의 실력만 발휘하면 80%는 주위에서 만들어준다’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아요.”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할 때 스승은 김백봉 선생(현 서울시무용단장)이었다. 겨우 뽑은 남학생 제자가 수업은 뒷전이고 대학생디스코연합동아리인 UCDC를 만들어 TV에서 디스코나 춰대는 걸 못마땅해 하셨다. 그러나 “네 춤사위는 너만의 개성이 있다. 뭘 하든 유명해질 것”이라며 그의 독특한 박자감각을 꿰뚫어봐 주었다. 현대무용을 가르친 박명숙 교수는 MBC무용단 상임안무가로 일하던 그가 공부를 더 하도록 이끌었다. 서병구는 그에게서 안무의 방법을 터득했다. 김효경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은 ‘캐츠’에 가슴 두근거리던 그를 뮤지컬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리고 밥 포시(1927∼1987)가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중학생 때였다. AFKN에 미국 가수이자 배우인 라이자 미넬리가 나왔다. 흰 장갑을 끼고 챙이 위로 가볍게 말린, 높이가 낮은 검은 중절모를 쓴 미넬리는 비슷한 복장을 한 무용수들과 춤을 췄다. 그가 그때껏 봐온 춤과는 완연히 달랐다. 엄지와 중지를 살짝 튕기면서 머리 위로 탁 팔을 뻗고는 허리를 숙이고 엉덩이를 부드럽게 돌렸다. 물고기들이 물속을 유영하듯 무용수들이 무대 위를 천천히 그러나 날렵하게 이동했다. 음악과 춤이 맞아떨어지다 또 어느 순간에는 엉뚱하게 어긋나더니, 느닷없이 음악과 춤이 한 몸이 되는 황홀경이 펼쳐졌다. “지금도 생생해요. 마술 같았어요. 너무나도 다른 춤의 세계를 봤지요.”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알아보니 그건 미국의 전설적인 재즈댄스 안무가 포시의 작품이었다. 그의 춤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비디오로, 영화로, 각종 자료로 그의 작품을 섭렵했다. “우리나라에서 포시의 춤을 가장 먼저 이해하고,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그만큼 자신 있어요.”
그는 춤 이외의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먹고살 게 춤밖에 없었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정말 춤 말고 그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하다. 한때는 관능적이고 자극적인 춤을 선호했다면 이제는 동작이 맞지 않고 어설프더라도 영혼이 살아 숨쉬는 춤을 구현하고자 한다. 뮤지컬 안무의 정답을 안다고 뻐기던 때도 있었지만 과거지사다. 그의 포부는 더욱 노력해서 자신이 하는 일을 더 오래, 더 많이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는 아이돌 그룹 백댄서들의 춤까지도 유심히 살핀다. 지금 바로 여기의 흐름을 놓치면 언제든 도태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병구가 전신거울 벽 앞에서 늘씬한 배우들을 이끌고 춤을 춘다. 배가 더 불룩해지고 완전히 백발이 되어도 그의 자리는 늘 저기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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