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씨와 같은 방에 있던 여성 15명은 상습 탈북자로 북송되면 죽는다는 체념이 들었던지 방에서 몸을 흔들며 시끄럽게 노래를 불렀다. 이에 공안이 벌을 준다며 군견을 푼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상처를 봐달라며 20대 여성이 내민 엉덩이에 드러난 살점을 안 씨는 아직 잊지 못한다고 했다.
공안들은 개를 내보낸 뒤엔 “자궁 안에 숨긴 돈을 꺼내라”고 협박해 돈을 뺏어갔다고 안 씨는 증언했다. 수용될 때 맡긴 옷 안의 돈을 공안들이 다 가져가기 때문에 상습 탈북 여성들이 종종 그렇게 숨긴다고 한다. ▼ 6평 시멘트방에 양동이똥통 1개… 여성 56명 속옷만 입고 지내 ▼
전날인 21일 오후엔 다른 방에서 임신 3개월 된 여성의 비명이 들렸다. 공안이 “배가 아프니 병원에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여성을 복도로 질질 끌고 나왔다. 머리부터 군홧발로 걷어차더니 이내 배를 찼다. 안 씨는 “바닥에 피가 물처럼 질질 흘러나왔다. 하혈인 듯했다”고 기억했다. 여성은 어디론가 끌려갔고 죽었다는 얘기가 수용소에 퍼졌다.
탈북자 강제송환에 항의해 중국대사관 앞에서 단식 시위 중인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의 농성장에서 25일 만난 탈북자 안 씨는 2시간여 동안 9년 전의 악몽을 또렷이 기억해냈다. 군견 사건과 수용소 방 구조를 설명할 땐 일어서서 재연해 보이기도 했다.
안 씨는 자신이 국가안전보위부에 있었으며 함경남도 한 지역의 위원장이었다고 소개했다. 아버지는 노동당 고위 간부를 지냈다.
수용소에 도착한 안 씨는 속옷만 입은 채 작은 방에 갇혔다. 방의 크기가 “지금 살고 있는 집(43m²·13평)의 절반 정도였다”고 했다. 그 안에서 여성 56명이 생활했다. 하루 한두 끼 나온 식사는 계란 두 개만 한 빵 한 개였다. 가끔 시래기 같은 반찬이 나왔다. 수용소에 들어갈 때 받은 나무젓가락 하나를 계속 써야 했다.
수용소 바닥은 찬 시멘트였고 니스를 바른 종이가 깔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더러운 이불이 하나 있었다. 먼저 들어온 일부가 이불을 같이 덮었고 나머지는 그냥 쭈그린 채 생활했다. 이불마저 성하지 못했다. 생리대를 주지 않아 이불솜을 떼서 사용했다. 방구석에 놓인 양동이 하나가 ‘똥통’ 역할을 했고 분뇨가 가득 차야 밖에 버릴 수 있었다.
중국인의 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체포된 한 여성은 수유를 못해 가슴 통증이 심했다. 수용자들이 젖을 짜주거나 젖이 돌지 않게 속옷을 찢어 가슴을 동여맸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면회 와 “젖 한 모금만 먹이게 해 달라”고 간청했을 땐 공안이 허락하지 않았다.
복도 건너편엔 탈북 남성들만 모은 방이 있었다. 안 씨가 위원장으로 있던 곳의 대대에서 복무했던 군인 이모 씨(당시 26세)는 전기곤봉, 물고문을 받았다고 하소연했다.
안 씨는 수용 6일 만에 북송됐다. 이때 만난 탈북 남성은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연유를 물으니 “몰래 담배를 피우다 걸려 공안들이 군홧발과 쇠뭉치로 손가락을 짓이겼다”고 했다.
안 씨는 2009년 탈북해 다음해 11월 한국에 왔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을 비난하는 ‘불온세력’을 색출하는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왜 2003년 3월 투먼 수용소에 갇혔을까. 안 씨의 설명은 이랬다. 1990년대 말 한국의 이모 목사가 중국 조선족 여성 윤모 씨에게 성경책을 숨겨 북한에 들여보냈다. 윤 씨는 세관에서 적발됐다. 당국은 윤 씨를 풀어주는 척하고 기독교인을 가장한 안 씨와 만나게 했다. 이후 조선족 여성들이 안 씨와 만나 선교 계획을 얘기했다. 그의 임무는 이들의 신뢰를 얻어 이 목사를 북한으로 납치하는 것이었다.
안 씨의 주장이 맞는다면 북한은 대북 선교자들을 대상으로 ‘역(逆)공작’을 폈음을 보여준다. 그는 2003년 이 목사가 중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공명심에 보위부 허락 없이 중국으로 갔다가 체포됐다. 안 씨는 북송돼 구류생활을 한 뒤 노동단련대로 보내졌고 점차 자신의 일에 환멸을 느꼈다.
안 씨는 고향에 자녀가 남아 있다. 그는 18일 탈북자들이 또 체포됐다는 소식에 ‘혹 내 아이들이 아닐까’ 걱정하며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23일부터 박 의원의 농성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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