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집을 공부하면서 처음에는 ‘조선집에는 분명 그들의 삶의 태도가 묻어 있을 것이고, 그 삶의 태도는 그들의 가치에서 나왔을 것이고, 그 가치는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性理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리학이 어떻게 조선집들을 규정하고 있는지에 대해 파고들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성리학을 대하는 옛사람들의 태도도 너무나 다양했고, 철저한 성리학자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정작 자기 집을 지을 때는 노장(老莊)적인 면모를 드러낸다든지, 아예 풍수지리(風水地理)의 달인인 경우도 많았다. 그런 경우에는 거꾸로 그들이 지은 집을 바탕으로 그들의 학문적 연원을 새로 탐사해야 했다. 남명 조식이 그런 경우였고, 고산 윤선도가 그랬다. 그런 경우는 그들의 방대한 지식에 도저히 따라가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성리학 이전부터 우리의 몸속에 지금도 남아 있는 전통적인 자연관이 성리학자들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은 작은 안도였고, 동시에 또 다른 백지상태가 마련되는 절망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나는 옛집들을 더 정확히 읽어가기보다는 이 집들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나를 발견했다.
조선집에는 많은 형식이 있다. 살림집에서부터 서원, 향교, 재사, 정자, 별서정원, 별당 등 시대별로 또 다르고, 지역에 따라 또 달랐다. 그중에서 잡히는 하나는 그 많은 조선집의 형식 가운데에서도, 완성된 형식과 완성되지 못한 형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조선집 가운데 가장 완성된 형식은 살림집이었다. 거기에는 정확한 태도가 스며들었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정자도 확연했다. 원림(園林) 건축은 분명한 조성원리가 있었던 만큼 그 자유로운 형식이 완성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완벽해야 할 서원건축의 형식이 완성되지 못하고 쇠락한 것이었다. 원인은 성리학의 타락에 있었다. 그 병폐가 건축에도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재사건축이었다. 가장 왕성한 실험이 벌어졌음에도 우리의 근대는 이 실험을 지속할 수 없었다. 서원과 달리 가문중심의 규약으로 이루어지던 재사건축이 식민지 수탈 경제로 바뀌면서 맥이 끊긴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이 완성되지 못한 형식은 공간적으로 충분히 지금도 실험 가능한 훌륭한 우리의 건축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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