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그것]생명 살리는 수술과 기타의 화음, 모두 정교한 손끝서 결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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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해균 선장 주치의 이국종 교수와 록음악

11일 아주대병원에서 이국종 교수가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 수술복을 벗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일이 생기면 바로 가야 한다”면서 끝내 벗지 않았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1일 아주대병원에서 이국종 교수가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 수술복을 벗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일이 생기면 바로 가야 한다”면서 끝내 벗지 않았다. 수원=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고요하다. 그런데 오싹하다. 뭔지 모를 엄숙함,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벽을 타고 흐른다. 아니나 다를까. 환자가 실려 오고, 정적은 보란 듯 사라진다. 이제 이곳은 전쟁터다. 그리고 전장의 중심에는 그가 있다. 이미 환자의 피로 벌겋게 물든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그는 환자의 상처 부위를 벌린 뒤 수술용 가위로 파헤친다. 날카로운 흉기에 찔려 상처가 깊은 환자의 상태는 촌각을 다투는 상황. 살리는 게 우선이다. 흉기가 어디까지 미쳤는지, 불순물이 들어갔는지 등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일단 상처를 파고들어야 한다. 수술은 정신없이 진행된다. 긴장감을 느낄 겨를도 없다. 남자치곤 가늘고 곱상하기까지 한 그의 손. 섬세하다. 마술하듯 분주하게 환자의 상처 부위를 넘나든다.》

■ 수술실의 록 음악

“휴∼.” 얼마 뒤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나온다. 안도의 한숨이다. 다행히 큰 고비는 넘긴 듯하다. 실핏줄이 터질 듯 그의 눈에 들어갔던 힘도 그때서야 좀 풀린다. 남은 건 환부를 덮는 정리 수술. 수술 장갑을 바꿔 끼러 가는 길에 그가 음악을 튼다. 그런데 장르가 좀 의외다. 수술실을 가득 채운 건 요란한 전자기타 소리. 그가 좋아하는, 미국의 세계적인 록 밴드 ‘린킨 파크’의 노래다.

이국종(43·아주대 의대 중증외상특성화센터장)은 그렇다. 의학 드라마에서 나옴직한 잔잔한 클래식 대신 그는 수술실에서 록 음악을 듣는다. 이유를 물었더니 간단하다. 원래 록을 좋아한단다. 그래도 한마디 더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그래요. 훈련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는 길이 더 힘들다고. 우리도 그래요.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위급한 수술을 끝내면 긴장이 풀려 피곤이 몰려옵니다. 그럴 때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충격요법이 제겐 록 음악이죠.”

어린 시절 그의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6·25전쟁 때 지뢰를 밟아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2급 국가유공자였다. 6·25 참전용사의 가족에겐 영광보다 상처가 훨씬 컸다. 이국종은 중학생 때까지 학교에 국가유공자 가족이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받을 수 있는 조금의 혜택보다 속된 말로 ‘병신의 아들’이란 손가락질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약주를 하면 언제나 신세를 한탄하던 아버지는 이날따라 서럽게 울었다. 아버지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미안하다.” 계속 그 말만 반복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하게 어린 그의 마음을 울렸다. 한번은 어머니가 동사무소에서 상이군인에게 지급하는 밀가루를 머리에 이고 오던 중 그것을 떨어뜨렸다. 남의 눈을 피해 밤 시간에 다니다 발을 헛디딘 것이었다. 모자(母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밀가루를 주워 담았다. 그러다 갑자기 가슴이 울컥했다. 세상이 장애인과 그 가족에게 너무 비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내가 크면 아픈 사람에게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않으리라.’

중학생 때 그는 축농증을 심하게 앓았다. 동네엔 병원이 없었다. 한참을 걸어 큰 병원에 갔다. 당시 국가유공자 가족에겐 일종의 의료복지카드가 주어졌다. 하지만 카드를 내밀었을 때 간호사의 반응이 싸늘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다른 병원에 가라고 짜증을 냈다. 다른 몇 곳의 병원도 마찬가지. 이런 경험은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를 냈다.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다 찾아간 한 병원. 카드를 보여줬음에도 의사는 정성껏 진료를 해줬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카드를 보고도 잘해 주시네요.” 그러자 의사는 놀란 표정으로 “왜 네가 그런 걱정까지 하느냐”며 되물었다. 또 “아버지가 자랑스럽겠다”라고 말하면서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후 그 의사는 진료비도 받지 않았다. 이국종이 올 때마다 항상 특유의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공부 열심히 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했다. 그땐 몰랐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지. 하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모습, 그리고 사람 가리지 않고 성심껏 치료해 주는 그 모습이 멋지단 생각은 했다.

■ 그냥 왔다, 여기까지

1988년. 이국종은 아주대 의대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항상 말했다. “돌아서 가기보단 차라리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게 낫다. 남자는 죽을 때까지 길바닥에서 일하다 파편처럼 흩어져야 한다.” 이런 가르침 때문일까. 대학생 이국종은 나이답지 않게 결벽에 가까울 만큼 원칙에 집착했다. 그 시기 대학생들이 그렇듯 그도 한때 학생운동에 심취했다. 한번은 운동권 서클에서 성조기를 밟는 의식을 했다. 그런데 실제 그 행사에 쓰는 비용보다 준비하면서 먹고 마시는 돈이 더 많이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는 미련 없이 활동을 접었다. 아무리 의미가 좋더라도 원칙이란 잣대에 어긋나면 안 된다. 이게 20대 초반 이국종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도 낭만에 빠질 때가 있었다. 특히 음악을 들을 때만큼은 그랬다. 당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잡아봤을 법한 통기타. 이국종도 마찬가지였다. 기타에 심취해 독학으로 연습했다. 레드 제플린, 오지 오스본, 시나위 등 록 뮤지션들의 음악에 심취했고, 친구들과 음악 얘기를 할 때면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전공으로 외상외과를 선택한 이국종은 이제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됐다. 사실 국내에서 외상외과 전문의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드물다. 힘들어서다. 이국종 팀은 한 해 평균 중증외상환자 300명을 치료한다. 집에 가는 날보다 병원에서 당직을 서는 날이 더 많다. 그런데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대접은 못 받는다. 일단 그의 환자 대부분이 ‘없는’ 사람들이다. 건설노동자 등 이른바 블루칼라 직군이 외상으로 다칠 가능성이 커서다. 중증외상환자는 진료수가가 워낙 낮은 데다 병실 회전율까지 낮다. 수지 타산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병원들이 꺼린다. 그나마 그가 일하는 아주대병원은 신경을 써 주는 편에 속한다. 정부의 지원 역시 미흡한 상황이다.

남들은 1년 버티면 ‘의무 방어’ 했다고 여기는 곳에서 그는 어떻게 버텼을까. 어떤 사명감 때문이냐고 물었더니 대답 대신 쓴웃음이 돌아왔다. 그는 “솔직히 처음 시작할 땐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다”고 했다. 또 항상 사표를 가슴 속에 품고 다녔고 지금도 그렇다고 했다. “죽어라고 해도 뭔가 미래가 보인다면 참고 했겠죠. 근데 외상외과는 그게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마다, 또 질식할 것처럼 사방에서 조여 올 때마다 빛이 드는 작은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냥 그 빛을 따라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 저승에 환자 명단 가지고 갈 것

그는 힘들고 답답해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나마 그런 그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팀 동료들, 그리고 음악이다. 새벽까지 수술한 뒤 ‘이젠 정말 못하겠다’는 답답한 마음을 음악으로 추스른 경험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한동안 접었던 기타도 최근 다시 들었다. 지금은 아주대병원 밴드 ‘어레스트(Arrest)’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며 지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새벽 시간에나 잠깐 연습할 만큼 바쁘지만 그에겐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하고, 또 행복하다. “외과 의사들끼린 ‘손목 스냅’만 잠깐 지켜봐도 그 내공을 알 수 있죠. 아무리 이론이 완벽해도 결국 손끝에서 결판나는 게 생명을 만지는 외과 수술입니다. 1mm 차이로 안 나던 피가 날 수도, 나던 피가 멈출 수도 있어요. 이게 ‘막노동 정신’인지, ‘장인 정신’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기타 연주도 외과 수술과 비슷해요. 그래서 매력을 느낍니다.”

이국종의 말투는 담백하다. 표정도 없는데 이상하게 믿음이 간다. 그래서일까 병원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환자나 보호자 중 이 교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전한다. 그에게 지난해 초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의 주치의로 유명세를 탄 뒤 달라진 게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유명세가 거품이란 걸 잘 안다”며 한마디로 매듭지었다. 실제 그의 일상은 변함없다. 정신없이 환자 보고, 가끔 음악 듣고 그런다.

‘사명감’ 같은 그럴 듯한 한마디를 유도했지만 그는 끝내 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음지에서 봉사하는 의사들이 수두룩하다”면서 “나는 부족한 사람”이란 말만 반복했다. 그럼에도 그의 말 한 대목에서 ‘독한 자부심’을 언뜻 엿볼 수 있었다.

“지금 함께 있는 정경원 교수(36)가 처음 왔을 때 제가 이런 얘기부터 했어요. 혹시 외제 차 타고, 골프 칠 생각이면 지금 때려치우라고. 그 대신 후회 없이 끝까지 한다면 죽은 뒤 저승에서 환자 명단은 내밀 수 있을 거라고 했죠. 살든지 죽든지 저랑 끝까지 함께한 환자가 벌써 1500명쯤 돼요. 신도 그 명단은 한 번쯤 봐주지 않을까요.”

수원=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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