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그것]진 켈리의 명장면이 흐르자, 내 끼를 가리던 안개가 걷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23일 03시 00분


뮤지컬 스타 최정원이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본 그때

준비돼 있다면, 무대에 선다면, 즐기고 있다면 어떤 역을 맡든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지금까지 왔다. 뮤지컬 ‘시카고’ 공연 직후 서울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극중 벨마의 모습인 최정원을 촬영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준비돼 있다면, 무대에 선다면, 즐기고 있다면 어떤 역을 맡든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지금까지 왔다. 뮤지컬 ‘시카고’ 공연 직후 서울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극중 벨마의 모습인 최정원을 촬영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굿나이트 키스, 그러고 “잘 자요, 캐시” “잘 가요, 돈”. 사랑하는 여인을 집에 들여보낸 돈(진 켈리)은 그를 기다리던 차를 보낸다. 잠시 우산을 쓰고 걷다가 환희로 가득한 얼굴에서 새나오는 흥얼거림. “두비두∼두, 두비두비두두∼” 갑자기 우산을 접고는 가로등 기둥에 매달려 한바퀴 휘돌더니, 이윽고 흥겨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빗방울 내리치는 보도와 물이 고인 하수구 옆 차도에서 물장구를 쳐대며 펼치는 탭댄스. “I’m singing and dancing in the rain∼”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오는 행인에게 우산을 건네고 멀어지는 돈. 가족들은 TV 속 그 장면을 보며 웃었다. 그런데 영파여고 2년생 최정원(43·뮤지컬 배우)은 울었다. ‘저게 뭐지? 이 마음은 뭐지?’ 그때 그는 이미 결심했다. ‘뮤지컬을 해야지.’ 》
○ 박수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뒷산 꼭대기에 있던 최정원의 집까지 가려면 계단을 100여 개 올라야 했다. 집에서 계단을 30개쯤 내려가면 산중턱에 평지가 있고, 다른 집들이 있고, 구멍가게도 있었다. 날이 더워지면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평상이나 계단에 돗자리를 펼치고 걸터앉아 더위를 피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우리 정원이 노래 한번 들어보자.”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놀고 있던 꼬마 정원으로서는 난생 처음 듣는 제안이었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목청을 가다듬고 가수 윤시내의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높은 산이 말하는 걸 난 모르겠네∼ 거친 파도 말하는 걸 난 모르겠네∼” 일곱 살쯤 된 아이가 허스키한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는 모습에 어르신들은 흠뻑 빠져들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허, 그놈 참…” 하는 탄성, 이내 작은 손에 쥐여진 눈깔사탕, 그리고 50원짜리 동전. 그러나 정원에게 사탕이나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박수였어요. 누군가한테 무슨 일을 하고 처음 받아 본 박수. 그 어린 나이에도 갑자기 뭔가 뜨거워지면서 찌릿찌릿 했어요. ‘내일은 무슨 노래를 불러서 박수를 받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어느새 다음 ‘무대’를 준비하는 어린이가 됐다.

정원의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노래를 잘했다. 물론 한참 뒤에 노래방에 함께 가서 확인한 것이긴 하지만. 어머니는 입식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마당에서 빨래를 할 때면 패티 김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원은 TV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그저 따라 부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수의 기교까지 모사했다. ‘이 아줌마는 여기서 숨을 더 내쉬는구나, 저 아줌마는 저기서 좀 더 꺾는구나.’ 춤을 따라 추는 건 기본이었다.

그의 층계참 공연은 연일 이어졌다. 풍부한 감성은 그때부터 있었는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하며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부를 때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도 했다. 어르신들은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다른 레퍼토리를 곁들일 때도 있었다. 어머니가 “정원아 울어”하면 2초도 안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거나 우리 강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랬죠.”

그의 소질을 눈여겨본 어머니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정원을 동네 한국무용학원에도 보내고, 청소년극단에도 집어넣었다.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주인공 아역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아버지는 딸이 무난히 중고교를 다니고 대학을 나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어린 정원을 찌릿찌릿하게 했던 그 떨림을 다시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 사력

TV ‘주말의 명화’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Singin’ in the Rain·1952년)’를 본 다음 날 정원은 종로 교보문고에 가서 뮤지컬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모두 꺼냈다. 당시 몇몇 극단에서 뮤지컬을 공연하고 있었지만 뮤지컬은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었다. 학교에서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하자 친구들은 뮤지컬이 뭐냐고 물었다. 그럼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개발한 거야.”

정원은 자신에게 끼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중고교를 다닐 때는 어디서 확인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웅변도 한번 배우지 않고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을 하기도 하고, 선생님이 나와서 노래 한 곡 해보라고 하면 “아니요, 두 곡 할게요”라고 할 만큼 자신도 있었다. 두 살 위 오빠가 듣던 미국의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연주에 빠져 배운 트럼펫으로 월요일 아침마다 전교생이 모이는 조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배경음악을 연주했다. 국어시간에 책을 읽으면 구연동화를 하듯 생생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통해선 그저 숨겨진 끼가 조금씩 드러날 뿐이었다.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점수에 맞게 살아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속으로는 항상 ‘아니, 이건 아니야’라고 했지만.

이 모든 혼란은 진 켈리가 빗속에서 춤을 추는 걸 보던 바로 그 순간 사라졌다. 정원은 길을 봤다. 대학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런 그에게 개관을 앞둔 롯데월드가 예술단원을 뽑는 기회가 왔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온 안무가와 배우들이 심사를 봤다.

그가 오디션에서 마이클 잭슨의 노래 ‘벤’을 성대모사 하듯 멋들어지게 부르자 그들은 찬사를 보냈다. 춤을 출 때는 사력을 다했다. 뮤지컬 ‘코러스라인’의 음악에 맞춰 안무가가 보여준 동작을 수십 명이 같이 따라했다. 발을 죽 뻗어 위로 올리는 동작에서 그의 오른발은 언제나 자신의 귀 뒤까지 넘어갔다. 그런데 그 넘치는 힘에 왼발이 지탱을 하지 못해 매번 우당탕 넘어졌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었다.

“나중에 그들이 그러더라고요. 춤을 잘 춰서라기보다는 ‘쟤는 가르치면 바뀌겠다’는 생각에서 뽑았다고요. 남들과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사실 저는 뮤지컬 아니면 할 게 없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 한 거죠.”

뮤지컬 무대에 선 지 23년째. 정원은 100번 연습한 노래와 1000번 연습한 노래의 차이를 너무도 잘 아는 배우가 됐다. 100번 하고 부르다 실수하면 정말 창피할 것 같다. 하지만 1000번 하고 나면 부르다 실수를 해도 창피하지 않다.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다. 무대 위에서 당당하다.

○ 떨림

몇 해 전, 뮤지컬 ‘맘마미아’의 주역을 맡아 첫 공연을 끝낸 날 동료 단원들과 뒤풀이를 하고 밤늦게 집에 들어갔다. 식탁에는 결혼한 뒤부터 14년째 자신의 아이를 돌봐주는 어머니의 메모가 놓여 있었다. ‘나는 오늘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의 공연을 보면서 그녀의 딸을 키우고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러웠다. 사랑한다.’

“완전 행복하죠. 엄마는 언제나 ‘칭찬쟁이’였어요. 정원이는 노래도 잘하고 너무 예쁘다고 입에 달고 사셨어요. ‘공부가 안 되니까 뮤지컬이라도 해라’ 이런 식이 아니라 ‘너는 그것도 잘하겠다. 도와줄게’라고 했어요. 항상 믿어주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행복한 이기주의자’라고 했다. 모든 건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행복해야 아이도 남편도 행복하다는 신념이다. “제가 행복하지 않고서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는 없어요.”

당연히 정원의 행복은 무대다. 그리고 막이 오르기 전 한 번도 빠짐없이 느꼈던 떨림이다. 약을 먹지 않으면 참기 어려운 생리통도 거뜬히 이겨내게 만드는 그 떨림, 그 무대. 그는 그 떨림이 사라지는 순간 무대를 내려오겠다고 말했다. 자기보다 뛰어난 후배가 있느냐고 묻자 “없다”는 대답이 바로 나왔다. “오, 저 친구는 노래는 좀 되네. 하지만 나처럼 죽을 만큼 무대를 사랑하는가? 하하하.” 그가 무대를 내려갈 때까지 아마 꽤 많이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꽤 많이 더 즐거울 것이다.

[채널A 영상] 사람은 떠나도 예술은 남아…추억의 가수들 뮤지컬로 부활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최정원#사랑은 비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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