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물 중 하나인 근정전(勤政殿)을 다시 보고 싶어 경복궁을 찾았다. 최근 관광객이 늘면서 예전의 호젓함이 사라졌기에, 서둘러 이른 아침 궁에 들어섰다. 때마침 겨울비가 추적거리며 내렸다. 너른 마당에 들어서니 빗속에서 거대한 궁궐의 적막감만 요연했다. 궁궐 뒤로 보이는 북악산도, 인왕산도 낮은 구름 속에 모습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풍경은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의 한 장면처럼 감미로웠다.
청자기와 얹은, 그리운 옛 모습
길이길이 큰 복을 누리라는 의미의 경복궁(景福宮·사적 제117호)은 그 이름을 지어 올린 정도전의 바람대로 되지는 못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다음 한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868년이 되어서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겨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현재 경복궁에 있는 건물들은 150여 년이 채 안 된 것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인 근정전도 마찬가지다. 소실되기 전의 근정전 지붕은 용 문양이 새겨진 청자기와로 덮여 푸른 유리지붕인 듯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그 모습을 실제로 보지 못하게 된 데다 여러 왕의 자취도 함께 사라졌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근정’이란 한마디로 ‘부지런하게 정치를 하라’는 뜻이다. 역시 정도전이 지은 이름인데,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가졌으면 하는 덕목을 아주 멋있게 드러내 놓았다. 이곳에서 왕은 국가의 중대한 행사들을 치렀다. 그중 즉위식은 근정전의 기능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대사였다. 정종을 비롯해 세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 등 일곱 임금이 이곳에서 조선의 왕이 됐다. 보통 선왕이 승하한 뒤였을 테니 즉위식은 더없이 엄숙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근정전의 분위기가 항상 딱딱한 것만은 아니었다. 외국에서 중요한 사신이 오면 잔치가 벌어졌다. 과거도 이곳에서 치렀고 합격자도 여기서 발표했으니 꽤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에 반해 흥선대원군이 재건한 이후 근정전의 역사는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일본은 침략의 홍보 수단으로 근정전을 이용했다. 조선총독은 여러 행사에서 용상(임금이 앉는 평상)이 있었던 자리에 올랐고, 독립군과 싸우다 죽은 일본 경찰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가 해마다 열렸다. 그야말로 지난 왕조에 대한 최악의 유린이었다. 사라지지 않고 버텨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하지만 지금도 주인 없는 궁궐의 공허함은 감출 수 없어 보인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근정전
우산을 접고 근정전을 감싸고 있는 행랑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나는 이곳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싶을 때 몇 바퀴고 반복해 돌며 생각에 빠지곤 한다.
여러 각도에서 근정전을 바라보며 역사 속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장엄한 즉위식, 떠들썩한 사신 접견 장면, 과거를 치르던 선비들의 진지한 모습, 그리고 경복궁 뜰에 들어온 호랑이(태종실록에 ‘호랑이가 궁궐에 들어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때문에 소란스러웠을 풍경까지. 이윽고 전란의 혼돈 속에서 불타는 근정전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 뒤로 사라지는 장면에 이르니 마음이 더없이 착잡해졌다. 소리 없이 내리는 겨울비가 마당에 깔린 박석(얇고 넓적하게 뜬 돌) 사이의 틈으로 흘러, 모서리 배수구에 모여 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멀리 사정전(思政殿·근정전 뒤의 건물)에서 걸어 나온 세종이 근정전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은 매일 새벽 일찍 사정전에서 어전회의(임금의 앞에서 중신들이 모여 국가 대사를 의논하던 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진정 부지런한 정치를 몸소 보여 준 성군이었다. 나는 그를 따르는 여러 신하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행랑 끝에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처마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걸 느꼈다. 넓게 고인 물웅덩이에 비친 또 하나의 근정전이 빗방울에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순간 오래전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푸른 기와의 옛 근정전이 비쳤다. 아, 아름답구나. 짧은 감탄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빛깔은 이내 회색 하늘에 겹쳐 빗속으로 사라졌다. 가냘프지만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비의 두드림이 이어졌다. “겨울답게 눈이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쓸데없는 푸념만 늘어놓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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