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12년차이던 2002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느라 힘들었지만 열심히 일했고 성과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 허전했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앞으로 12년은 어떨까. 혹시 내 앞에 앉아있는 상사가 나의 미래?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내 일’을 찾아서 내 힘으로 설 수 없으면 내일을 꿈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디컬 언더웨어’를 만드는 ‘클레버메리엔’의 강은정 대표(46)는 지난달 서울 광화문 부근의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나 수줍게 명함을 건넸다. 대표라는 직함 옆에 ‘약사’라는 단어가 도드라져 보였다. 클레버메리엔은 ‘똑똑하다(clever)’라는 뜻의 영어 단어와 강 대표의 천주교 세례명(Merienne)을 합친 것이다.
차분한 모범생 인상의 강 대표가 걸어온 길은 회사원 생활을 그만두기 전까지 순탄했다.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그는 세계적 화학회사 바스프를 거쳐 화장품 기업 로레알에서 근무했다. 로레알에서는 약국 전용 화장품 ‘비쉬’와 더마 코스메틱 ‘라로슈포제’의 마케팅 전략을 짰다. 여기까지는 남부러울 것 없는 이력.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반전(反轉)이 시작됐다.
○ 실패 또 실패
‘약사 출신 뷰티 마케터’라는 직업을 포기한 대가는 컸다. 퇴사 후 자리 잡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2009년 출시한 ‘허그팬티’가 지난해 1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며 첫 성공작이 됐다.
“막상 회사를 그만뒀는데 뭘 해야 할지 몰랐던 거죠. 화장품 인터넷 쇼핑몰을 해봤는데 보기 좋게 망했어요. 화장품과 제약회사의 마케팅 대행 업무를 하며 돈을 벌었죠. 그런데 남의 회사를 위해 논문을 번역하고 홍보책자를 만들려고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잖아요. 늘 목말랐어요.”
‘내 일’을 찾던 강 대표는 우연히 원적외선이 자궁을 따뜻하게 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봤다. 문득 결혼 후 4년 동안 아기를 갖지 못해 고생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해서 제1호 사업 아이템인 ‘원적외선 팬티’가 탄생했다. 자신의 경험과 약사로서의 전문성, 여기에 모든 여성의 배가 따뜻해졌으면 하는 바람까지 더해 내놓은 야심작이었다.
결과는 또 실패였다. 출시 후 3년간 팔았지만 재고만 쌓였다. 수백 명의 지인에게 써 보게 했고 좋은 평가도 받았는데 왜 안 팔렸을까. 강 대표는 “원적외선 팬티가 ‘신대륙’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바이오 팬티를 비롯한 각종 기능성 팬티와 다를 게 없었다”고 말했다.
제품은 좋은데 고객들이 안 알아주는 것 같아 억울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로부터 ‘좋은 제품이 잘 팔리는 게 아니라 잘 팔리는 게 좋은 제품’이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마케팅 관련 서적을 쌓아놓고 실패 연구에 돌입했다.
○ 콜럼버스보다 싱클레어가 돼야
클레버메리엔 측은 배 위까지 가려주는 ‘허그팬티’가 가슴 아래부터 골반에 이르는 부위를 따뜻하게 보호해 준다고 설명했다. 온라인 체험단을 통해 입소문을 타고 히트 아이템이 되자 최근 와이어가 없는 브라톱인 ‘허그탑’, 배 부위를 덮는 ‘허그워머’ 등을 잇달아 출시했다.
이 제품들은 기능만큼 디자인에도 신경을 쓴 티가 역력하다. 강 대표는 화장품 회사에서 알던 인맥을 활용해 로고와 제품 디자인, 브랜드 이름까지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게 의뢰했다. 지금도 사무실에는 최소한의 인력만 두고 제품 생산과 홍보 마케팅 업무를 외부 업체에 맡기고 있다. 최근에는 기자들을 초청해 이례적으로 특급호텔에서 제품 설명회를 열었다. 제품의 품질만큼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고 알리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약사의 시각으로 팬티의 기능에만 매달렸으니 실패했던 거예요. 여자들이 언더웨어를 선택할 때는 기능보다는 디자인, 브랜드 그리고 그것이 주는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뒤늦게 안 거죠.”
강 대표는 자신처럼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 콜럼버스가 아닌, 알을 깨고 나온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되라”고 조언했다. 한 분야 전문가라는 틀에 갇혀 실패를 거듭한 자신의 경험을 거울로 삼으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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