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였던가, 고등학교 동창이 주선한 소개팅에 나간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 뒤로 마주 앉아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한 여자는 올해 환갑을 맞은 그의 어머니가 유일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주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암만 집구석에 처박혀 있다 해도 머리도 감고 세수도 좀 하고 그래라.” “시험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뭐 한다고 맨날 그렇게 새벽까지 불 켜 놓고 있어? 전기세는 뭐 나라에서 공짜로 내주는 줄 알아?” “환갑 넘긴 네 아버지도 저렇게 새벽부터 밤까지 택시 모느라 고생하는데….”
물론 그 또한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한심하게 흘러가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수도권 소재의 한 사립대 행정학과에 입학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졸업과 동시에 7급 공무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앞날이 비 갠 다음 날의 하늘처럼 창창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시험에서 떨어지고, 7급에서 9급으로, 노량진에서 다시 동네 공공 도서관으로 옮겨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점점 커지고 또렷해진 단어는 오직 하나, 낙오자, 글씨 모양새마저도 강파르고 야박해 보이는 단어,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는 이제 더이상 공공 도서관에도 나가지 않았고, 시험공부도 하지 않은 채, 제 방 한쪽 구석에 틀어박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머리는 일주일에 한 번 감을 때가 많았다.
그런 와중에 그의 휴대전화로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채현종 사장님 핸드폰 맞지요?” 그것은 명백히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그의 낡은 폴더형 휴대전화는 지난 몇 달 동안 단 한 번도 울린 적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연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에 보내드린 우편물 보셨어요? 짧게라도 시간을 내주시면 제가 더 자세히 설명드릴 수 있는데….”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상냥했고 친절했으며, 또 조금 간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창문 밖을 무연히 바라보다가 “그럼, 만나서 얘기하시죠, 뭐”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라기도 했지만, 또 한편 누군가가 못 견디게 그립기도 했다. 그는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약속 시간 이십 분 전이었지만, 여자는 벌써 커피숍에 나와 있었다. 커피숍에는 여자 외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그는 커피숍 통유리 밖에서 흘끔흘끔 여자를 훔쳐보았다. 여자는 보험설계사라고 했다. 그녀는 지금 ‘채현종 사장님’을 만나 변액 연금보험 가입을 성사시킬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커피숍 통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허름한 점퍼와 무릎이 나온 청바지, 세 달 넘게 깎지 못한 머리카락까지. 처음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는 계속 ‘채현종 사장님’으로 행세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누군가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통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곤 이내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그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가 막 돌아서려고 했을 때, 여자가 휴대전화를 들고 커피숍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 철민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오늘 중요한 약속 때문에 그랬어.” 여자는 커피숍 반대편 대로를 바라보면서 통화를 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엄마가 다음엔 학교에 꼭 갈게. 진짜야. 응응, 그래 약속할게.” 여자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쉽게 커피숍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몇 번 하늘을 쳐다보았고, 멀거니 통유리 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백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기 시작했다. 그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는 자신의 마음과 싸워야만 했다. 그는 용기를 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후, 커피숍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그녀에게 다가가 더듬더듬,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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