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소설]<10>아파트먼트 셰르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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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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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십칠 층이었다. 한 층에 계단이 열아홉 개씩 있으니까 십칠 층이면 삼백이십 개가 넘는 계단이었다. 이제 진짜 이놈의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때가 된 것 같다. 오늘까지만, 오늘까지만…. 그런 생각으로 나는 가게 문을 나섰다. 오늘만 벌써 아홉 번째 배달이었다.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렸다.

고시원비라도 조금 보태 볼까,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다. 제대 후 학교에 복학해 보니 기숙사 순번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면 소재지 장터 한 귀퉁이에서 작은 종묘사를 운영하는 아버지에게 차마 서울의 어마어마한 자취방 보증금까지 부탁할 순 없었다. 그렇게 해서 찾은 아르바이트였다. 고시원과 같은 건물 일층에 있는 ‘만나’ 치킨집 배달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 거기에 적혀 있는 시급 육천 원 글씨만 보고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었다.

“근데, 사장님. 여긴 원동기 운전면허 자격증 없어도 되나요?”

저녁부터 바로 출근하라는 오십 대 중반의 머리가 약간 벗어진 사장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우린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 단지만 배달하라는 거라서… 체력은 괜찮지?”

내 실수라면 그때 사장의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거기에 생략된 진실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데 있었다.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만나’ 치킨집 앞, 총 팔백 가구가 거주하는 이십오 층 높이의 ‘행복 아파트’는 배달 사원들의 승강기 사용을 일절 금하고 있었다. 아파트 일층 엘리베이터 옆에 그런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당 아파트에 출입하는 배달사원들로 인해 주민들의 이용 불편과 승강기 유지 관리비가 발생하므로… 반드시 계단을 이용해….’

처음 그 경고문을 보고 이게 뭔가, 나는 잠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반사적으로 몸을 실었다. 첫 배달은 십일 층이었다. 에이, 뭐 별일 있으려고.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배달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지없이 깨져 버렸는데, 사장이 사뭇 미안한 얼굴로 ‘거, 엘리베이터 탔구나? 경비실에서 CCTV로 다 보고 있어. 그러면 안 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나는 사장이 면접 자리에서 체력 운운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좀 당황했지만, 첫날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뛰어다니기만 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십이 층에서 구 층으로, 사 층에서 다시 이십일 층으로…. 자정 무렵 마지막 배달을 마칠 때까지 나는 뛰고 또 뛰고, 오르고 또 올랐을 뿐이었다. 그렇게… 두 달 넘도록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두 달 동안 나는 치킨 배달 아르바이트가 아닌, 흡사 히말라야 산악인들을 위한 셰르파가 된 심정이었다(언젠가 한번은 십팔 층까지 낑낑거리며 올라갔더니 내 또래 젊은 여자가 ‘어머, 우리는 프라이드 아닌 양념 시켰는데요?’라면서, 다시 갖다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그 여자 앞에 무릎 꿇고 ‘제발 그냥 프라이드 먹으면 안 될까요?’ 두 손 모아 빌 뻔했다).

퇴근해서 고시원 작은 침대에 누우면 계단이 눈앞으로 일어서는 듯한 환영이 보이기도 했다. 사장이 퇴근할 때마다 주는 생맥주 한 잔에 속아서 참아온 두 달이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놈의 엘리베이터, 그놈의 계단….

마지막 배달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계단을 오르려고 할 무렵, 엘리베이터에서 마흔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내렸다.

“저기 1702호 배달 가시죠? 주세요. 제가 갖고 올라갈게요.”

남자는 치킨값을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남자에게 치킨을 내밀었다.

“앞으로 저희 집 배달은 여기 엘리베이터 앞으로 오시면 됩니다.”

남자는 나에게 꾸벅 고개까지 숙인 후,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섰다.

나는 왠지 조금 울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게로 돌아가려고 몇 걸음 떼던 나는, 그때까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이게 왜… 이런 일들이 생긴 거죠?”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남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글쎄요. 아파트에 사니까 아파트만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남자는 그 말을 남긴 채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이기호 소설가
#아파트#배달#승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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