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절개되고 내장이 다 드러나 피가 뚝뚝 흐르는 인체, 입을 크게 벌리고 절규하는 교황, 흠씬 두들겨 맞은 권투선수처럼 부풀려지고 일그러지고 흘러내리는 인간의 얼굴, 십자가에 매달린 거대한 고깃덩어리.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의 그로테스크하고 폭력적인 그림들이다.
사람들은 흔히 미술작품에서 스토리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베이컨의 그림 같은 강렬한 작품을 보면 이야기를 꾸며내고 싶은 유혹이 한층 더 커진다. 폭력과 광기의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지가 짓밟힐 위험을 회화로 표현했다느니, 인간이 한낱 고깃덩어리 신세가 될 현대 사회의 비인간성을 고발했다느니 등등. 아일랜드계 영국인에, 어머니는 퍼스 철강회사 상속녀, 타고난 동성애적 성향으로 아버지와의 심한 불화, 고작 1년밖에 받지 않은 정규 교육, 10대 후반부터 런던, 베를린, 파리 등의 뒷골목을 동성애 파트너와 전전했던 밑바닥 인생 등의 개인적 히스토리도 극적인 작품 해석의 욕구를 더욱 부추긴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수많은 현실적 폭력과 자기 작품의 폭력성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처절하게 고함을 지르는 인물화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공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정작 그는 공포가 아니라 단지 고함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부풀려지고 깎여지고 일그러진 얼굴도 외관 밑의 내적인 운동 혹은 감각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지 현실 속의 폭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가끔 “인생은 아무 쓸데도 없는 하찮고 헛된 것”이라거나 “우리는 모두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다”라고 말할 때면, 나는 그의 잔인한 그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그를 좋아하는지를 문득 깨닫곤 했다.
최근에 결정적으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20여 년에 걸쳐 그를 인터뷰한 데이비드 실베스터의 책을 읽으면서였다. 베이컨은 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언제나 우파에 투표한다고 했다. 예술가는 가능한 한 자유로운 삶과 최적의 작업 환경이 필요한데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 우파라는 것이다. 좌파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적(idealistic)이어서 사람을 이념으로 억압한다고 했다. 그래도 사회정의라는 게 있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대담자의 질문에, 우리가 수백 년 전 과거의 사회를 기억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창조해 낸 작품들 때문이지, 평등했다는 것만으로 기억되는 사회가 있는가, 라고 그는 되물었다.
좌파 사상을 가져야만 고상하고 지적으로 보이며, 특히 예술가는 당연히 좌파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팽배한 지금 여기 한국 사회에서, 베이컨의 철두철미한 예술가 정신과 인생의 통찰이 나의 마음을 한없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해준다. 작년(2013년) 11월 뉴욕 경매에서 그의 삼면화 한 점이 1억4240만 달러(약 1527억 원)에 팔려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호통치며 군림하는 좌파 이상주의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증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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