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 소설]<17>제사 전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7일 03시 00분


코멘트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이기호 소설가
이기호 소설가
할아버지 제사 바로 전날 토요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작은아버지 내외와 첫째 고모, 둘째 고모 내외 모두 우리 집에 모였지요.

우리 할머니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온 식구가 다 모인 거라고 했습니다. 나랑 같은 방을 쓰는 우리 할머니는 올해 일흔다섯 살이신데, 뇌종양인지 뇌동맥 때문인지 얼마 전에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는 나를 보고 영감이라고도 불렀다가 큰스님이라고도 했다가, 또 어느 땐 정신이 멀쩡해져 내 이름을 불렀다가, 아무튼 영 정신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말짱할 때가 더 많은 건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모르겠지만, 작은아버지와 고모들 모두가 이번 주말에 우리 집으로 찾아온 건 다 할머니 때문이지요. 할머니가 내게 꼬깃꼬깃 접힌 종이쪽지를 내밀며 그분들에게 전화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나는 할머니가 부탁한 그대로 작은아버지와 통화할 때에도, 고모들과 통화할 때에도, 최대한 할머니 목소리를 흉내 내어 ‘야 이 연놈들아, 에미가 이제 정말 죽을 거 같구나. 에미가 정말 죽을 거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작은아버지와 고모들은 그런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가만히 전화를 끊곤 했습니다.

오랜만에 모여서인지 몰라도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내외, 고모와 고모부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할 때에도 그랬고, 제사상에 올릴 밤을 깔 때도 그랬습니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고모부들은 마치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말없이 텔레비전 뉴스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요? 막내 고모부가 “그러지 말고 형님들, 심심풀이로 고스톱이나 한판 치실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계속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전을 부치던 엄마는, 그 말이 뭐가 그리 반가웠는지 재빠르게 거실 한복판에 담요를 깔고 안방 서랍장에 있던 화투장을 꺼내 왔습니다. 미간을 웅크린 채 연신 헛기침만 해대던 아버지도, 마네킹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던 작은아버지도, 그렇게 해서 마지못해 화투판에 끼게 되었습니다.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아버지가 돈을 따는 거 같았습니다. 화투판 옆에 붙어 앉아 흘깃흘깃 바라보니, 아버지 앞에 지폐도, 화투장도 제일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버진 좀 전보다 표정이 많이 밝아졌고, 목소리도 부드러워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고, 동네에 돌아다니는 강아지들도 다 아는 것처럼, 첫 끗발이란 언제나 개끗발이지요.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뒷장이 맞지 않기 시작하더니, 연이어 독박에 피박, 광박까지 맞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앞에 있던 지폐들은 고스란히 작은아버지 앞으로 옮겨갔고, 아버지의 얼굴 또한 화투장 뒷면처럼 벌겋게 변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판이던가, 아버지가 첫째 고모부에게 벌컥 화를 냈습니다. “아니, 자네 내가 빤히 광박인 거 보면서 똥을 내면 어쩌겠다는 건가.” 그러자 첫째 고모부도 억울한 듯 말했습니다. “아니, 형님. 제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아버지는 고모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르긴 뭘 모르나 이 사람아. 돌아가는 판국이 뻔하구먼.”

그렇게 시작된 사소한 말다툼이 차츰차츰 커지기 시작해 “자네들, 아버지 돌아가시고 시골 땅 처분한 거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자 막내 고모부가 “아이고, 형님. 무슨 땅 문제 때문에 일부러 똥을 냈다고 그러세요?” 하면서 첫째 고모부를 두둔했지요. 그러자 작은아버지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형님이 그렇게 하시면 안 되는 거였죠”라고 말을 덧붙이고, 거기에 아버지가 “뭘 그렇게 하면 안 돼, 뭘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건데!”라고 쏘아붙이고, 첫째 고모부는 계속 “아니, 저는 그냥 똥을 낸 거뿐인데…”라고 웅얼거리고, 그러다가 결국 모든 판이 깨지고, 작은아버지 내외와 고모부들 내외가 돌아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다가,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비밀이라고 신신당부한 말들을 모두에게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가지 마세요. 할머니가 내일 죽는다고 했어요. 그거 보고 가세요.”

신발을 신던 작은아버지와 고모부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내일이 할아버지 제사니까, 할머니가 그때 죽는다고 했거든요. 그래야 제사도 한 번에 지낼 수 있다고. 자식들 두 번 걸음 안 시킨다고”

나는 할머니가 내게 말한 것을 그대로,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그제야 어른들은 굳은 듯 신발을 신던 것을 멈추었지요.

이기호 소설가
#제사#식구#고스톱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