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이 유연근로제로 전환한 이유가 모두 육아 때문은 아니에요. 봉사나 마라톤 연습 같은 취미활동 시간을 늘리려고 근무형태를 바꾼 경우도 적지 않아요.”
버진그룹의 빅토리아 오번 인사담당 디렉터는 지난달 30일 영국 런던 본사에서 기자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버진그룹은 지난해 초 유연근로제를 도입했다. 본사 근로자 170여 명 중 10명이 저마다 다양한 목적으로 근무형태를 바꿨다. 간단한 절차를 거치면 특정 요일에만 출근하거나 하루 4∼6시간 일하는 유연근로제로 전환이 가능하다.
오번 디렉터는 “초기에는 관리자 일부가 근태 파악이 어렵고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우려했지만 이제는 전반적으로 만족하는 분위기”라며 “회사와 직원 간 신뢰 구축이 제도 안착의 비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각종 편의를 제공받은 직원들이 이 제도에 만족하면서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지는 등 선순환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 육아 고민 엄마들, 시간제 일자리로 만족
주 5일, 하루 8시간 이상 근무하는 전일제 직원들은 대개 육아나 간병을 이유로 근무형태를 시간제로 전환한다. 영국은 한발 더 나아갔다. 6월 30일부터 시행한 ‘유연근로제 요구권’ 덕분이다. 이 제도는 취미활동, 여가생활 등 다양한 이유로 일하는 시간을 줄이려는 근로자가 회사에 근무시간 조정을 요구할 수 있게 보장한다.
요구를 받은 회사는 해당 직원의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한다. 대체인력을 못 구하거나 업무 특성상 전일제 근무가 꼭 필요할 때만 회사는 해당 직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영국 런던의 로펌 ‘3HR’에서 고용 법규 관련 컨설팅을 맡고 있는 이소영 변호사는 “유연근로제 요구권은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한 다양한 제도 중 하나로 각광받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한동안 영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로 몸살을 앓았다. 영국 정부는 법제화를 통해 이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1970년 같은 업무를 하는 남성과 여성이 임금 차별을 받지 않도록 ‘동일임금법’을 제정했고 2000년에는 전일제와 시간제 근로자를 차별하지 않는 ‘시간제 근로자법(Part-time Worker Regulation)’을 도입했다.
그 결과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적어 문제가 됐던 여성의 임금 수준은 점차 높아졌다. 여성 시간제 근로자의 시간당 임금은 전일제 남성 근로자의 61% 수준이다(2012년 영국 통계청 조사). 이는 전일제 근로자의 51% 수준인 남성 시간제 근로자와 큰 차이가 없다.
영국 최대 공공기관 노조인 ‘유니슨’의 샘프슨 로 정책국장은 “영국은 공공기관과 대기업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간제 일자리와 유연근로제가 점차 중소기업으로 확산되는 추세”라며 “임금이나 고용조건에 차별이 없는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는 여성들의 고용률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 경력 단절 없게 부모 책임 강조하는 스웨덴
스웨덴 스톡홀름에 사는 시크리 괴너 씨(45)는 매일 오전 9시 30분께 회사에 출근한다. 다섯 살배기 큰아들과 세 살 된 쌍둥이 두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기 위해서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아내 야니카 팔린 씨(44·여)는 조금 이른 오전 9시까지 출근한다.
부부는 퇴근 시간도 다르다. 월∼금요일 중 사흘은 남편이, 이틀은 아내가 오후 4시경 회사를 나선다. 어린이집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위해서다. 이들은 모두 유연근로제를 적용받는다. 남편은 전일제의 60%를, 아내는 80%를 일하는 방식이다.
괴너 씨는 “아내는 홍보와 마케팅을 맡고 있어 사무실을 지켜야 할 때가 많은 반면 재무 담당인 나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어서 일하는 시간을 좀 더 줄였다”며 “함께 낳았는데 엄마에게만 책임을 미루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스웨덴에는 부부가 함께 유연근로제를 적용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녀 성별 구분 없이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게 당연하게 인식되는 상황에서 육아에 대한 책임도 부부가 함께 져야 한다는 생각이 문화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스웨덴의 여성 고용률은 72.5%(2013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주당 30시간 이상 전일제로 일하는 25∼64세 여성의 비율은 87.5%(2012년)에 이른다. 1970년대만 해도 여성 고용률은 60% 미만이었다.
스웨덴의 전문직 노조인 TCO의 카린 필레테르 선임연구원은 “여성들의 경력이 단절되지 않으려면 남편의 도움이 필수”라며 “양육의 책임을 부부가 함께 질 수 있도록 정부가 각종 유인책을 계속 제시해온 결과 여성의 고용률이 지금처럼 높아졌다”고 말했다.
실제 1974년 발효된 부모보험법은 직장 여성에게 180일의 출산휴가를 보장했다. 1995년에는 직장 남성도 반드시 최소 30일의 출산휴가를 쓸 수 있게 했다. 2008년부터는 부모가 함께 출산휴가를 쓰면 정부가 보육수당을 추가로 지급하는 등 남성도 육아에 활발히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양윤정 한국외국어대 교수(국제지역대학원)는 “영국과 스웨덴 사례처럼 시간선택제 일자리의 확산은 양질의 일자리에 달려 있는 만큼 정부의 제도적 지원과 확대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시간선택제 도입 기업에 인센티브 줘야” ▼
경총 ‘주요 선진국 성공사례’ 분석 여성 10명중 4명 ‘시간선택제’… 공공-서비스 중심 활성화가 효과적
시간선택제 일자리 제도가 제대로 자리 잡은 나라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최근 내놓은 ‘주요 선진국의 시간선택제 경험과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이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시간선택제 활성화 국가들은 △시장 필요에 따른 노동시장 유연화 추진 △‘선(先) 활성화 후(後) 규제’로 제도 정착 △제도 도입 기업·근로자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공공·서비스 부문 중심의 시간선택제 일자리 창출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대표적인 국가는 네덜란드 스웨덴 독일 영국 일본이 꼽혔다. 전체 일자리에서 시간선택제가 차지하는 비율이 25% 이상인 나라들이다. 이들의 고용률은 70%를 넘는다. 이 국가들의 여성 10명 중 4명은 시간선택제 근로자였는데, 이들 중 70∼90%가 자발적으로 시간선택제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국가들은 대부분 과거 대규모 실업이나 경기 침체, 노동력 부족 현상 등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성장시대를 서서히 마감하고 성숙경제로 접어들고 있는 한국도 경기 침체와 노동력 부족 전망 등이 전혀 낯선 말이 아니다.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도입한 기업과 실제 근로자에 대한 정부 차원의 인센티브 제도도 갖추고 있었다. 독일 네덜란드 등은 기업에 대해 사회보험료(사회보장 분담금의 일종) 부담을 낮춰주고 있었다. 일본은 근로시간이 일반 근로자의 75% 미만이고 급여 수준이 일정 기준에 미달할 경우 배우자에 대한 건강보험을 무료로 적용해주는 혜택을 줬다.
산업별로 봤을 때는 공공·서비스 부문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제조·건설업에서의 시간선택제 근로자 비율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10% 이하로 나타났지만 서비스·공공 부문에서는 30∼70%로 높게 나타났다.
이광호 경총 고용정책팀장은 “선진국의 사례를 통해 시간선택제 활성화가 여성의 자발적 취업과 고용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며 “공공·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활성화 정책을 펼친다면 그 효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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