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한국계 입양아 출신 문화부 장관 플뢰르 펠르랭이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펠르랭 장관은 2012년 봄 입각한 이래 2년 동안 수많은 보고서, 서류, 뉴스를 보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역시 여성인 전 문화부 장관 오렐리 필리페티는 “책 없는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말로 즉각 후임자를 비판하고 나섰다. “음악 없는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니체의 말을 바꾼 것이다.
별로 지적(知的)이지 않은 사람들도 “저녁이면 책을 읽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는 프랑스 국민이니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한정된 하루 낮 12시간 동안 막중한 국정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업무 이외에 다른 책을 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정치인이 반드시 온갖 작가의 소설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 국민은 너무 문학적이고, 재빠르게 변화하는 이 디지털 사회에서 조금은 시대착오적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이라는 프랑스 기호학자의 책도 있듯이 동서고금의 많은 문필가들이 책 읽는 즐거움을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어른이 된 후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 놓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책 쓰는 일을 시작한 이래 순전히 책읽기의 즐거움을 위해 책을 사서 읽은 적이 별로 없다. 번역이나 저술에 필요한 책, 강의 준비를 위한 책, 논문의 참고 문헌용 책 등 하나같이 어려운 책들을 부지런히 찾아 머리 싸매고 읽었을 뿐이다. 가끔 말랑한 소설을 읽었다 해도 그것은 동시대적 관심에 대한 확인이라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에 의해서였다. 학위 논문을 쓰던 4∼5년간은 오로지 사르트르만 읽었다. 그의 책은 줄 바꾸기도 없이 600∼700쪽은 보통이고, 말년에 쓴 ‘집안의 백치’는 3000쪽이 넘는다. 고통스러운 글 읽기를 끝낸 후 나는, 노동 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는 그의 책 자체가 ‘노동 계급에 대한 억압’이라는 당돌한 결론을 내렸다.
지식에도 유효 기간이 있어서 물리학은 13년, 경제학은 9년, 심리학은 7년이 지나면 쓸모없는 지식이 되어 버린다는 이론도 있지만(‘지식의 반감기(半減期)’) 그건 일찍이 내가 책꽂이 앞에서 절감하던 생각이다. 루카치, 마르쿠제, 시몬 베유… 줄 쳐 가며 무던히도 열심히 읽던 그 책들은 지난 십수 년간 단 한 번도 다시 들쳐본 기억 없이 먼지만 쌓이고 있다. 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책은 수없이 다시 들치게 돼 그들의 유효 기간이 2000년이 넘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푸코, 데리다 등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도 시간에 따라 편차가 느껴지지만, 역시 칸트와 헤겔은 끊임없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문학으로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이 2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디고 있다. 누렇게 변색되어 바스러져 내리는 그의 책을, 시선의 문제 혹은 숭고미학의 주제를 위해 자주 꺼내 다시 읽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 세상에 대한 빛나는 통찰이 나의 책읽기가 주는 커다란 기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 ‘사랑의 선물’ ‘칠칠단의 비밀’ ‘십오소년 표류기’ 등을 읽던 그 옛날의 어린 시절이 눈물나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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