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남이가’라며 안으로 굽은 팔 아래 봐주고 대주고 몰아주고 밀어주다가, ‘쟤들이 남이여’라며 내리친 주먹 아래 뺏고 끊고 잘라내고 밀어내다가, 뭔가가 꼬인다. 꼬인 몸통이 드러날 즈음 누군가 죽는다. 죽은 자가 꼬리다. 몸통은 이제 다른 꼬리를 만들 것이다.
특정의 정치적 사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에 편재하는 일단면을 알레고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 다리만 건너면 다 통한단다. 학연, 지연, 친인척, 하다못해 사돈네 팔촌까지 뒤적이다 보면 어딘가는 걸린단다. 솥단지든 술잔이든, 베개든 문고리든, 그것들을 중심으로 오고가는 ‘사바사바’와 ‘알음알음’을 얘기한 것이다. 실은 숱한 거절을 하고 거절을 당했을 내 아버지 얘기며, 거절할 권력도 없던 내 얘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다섯 해째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생을 사시다 가셨는지 다 알지 못한다. 여든 다섯 해의 아버지 삶에서 나는 그 절반을 함께했을 뿐이고, 아버지 인생 후반에 해당하는 그 절반의 절반 중 일부만을 기억할 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는 퍼즐을 맞추듯 몇 조각의 기억과 말씀으로 아버지를 추억하고 아버지 삶을 완성해 가는 중이다.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이다.” 최근에 복기한 말씀 중 하나다. 우리 육 남매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 사회에 나가 작은 성공과 실패에 직면했을 때 이르셨던 말씀이다. 아버지 말씀 태반을 그렇게 했듯 나는 그 말을 잔소리로만 흘려듣곤 했다. 무슨 말인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일련의 알레고리가 권력의 수뇌부에서 재현되고 있는 최근, 그 말씀이 떠올랐다.
서른 즈음이었을까 마흔 즈음이었을까. 내 얘기다. 총체적으로 다면적으로 인생 난맥이었다. 딱히 불행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늘 바빴고 늘 시간에 쫓겼다. 엄마의 입말 중 “미친 년 널뛰듯”이라는 말이 있는데, 딱 그 형국이었다. 잦은 위염과 불면과 두통이 엄습해 오곤 했다. 그 난맥의 한 뿌리가 거절하지 못한 데 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명령이라서 거절하지 못했고 부탁이라서 거절하지 못했다. 제안이고 약속이라서 거절하지 못했고, 연대고 고백이라서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다. 거절을 못 했던 진짜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거래여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의 내가 상대에게 다시 명령하고 부탁하고 제안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또 다시 약속하고 연대하고 고백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거절할 수 있다는 게 권력이고, 거절하는 게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걸 알게 된 건 또 언제였을까.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못하는 건 뇌물 때문이거나 뇌물스러운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는 것이 선물이다. 따뜻하되 냉정하고 부드럽되 단호한 거절, 숙고하되 여지가 없는 거절, 마음을 담은 그런 거절은 거절하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만 상대방의 깨끗한 단념을 부른다. 지지부진한, 마지못한, 어쩔 수 없는, 어영부영한 거절이야말로 돈도 잃고 인심도 잃고 사람도 잃게 한다.
아버지가 깨끗한 거절을 하시며 사셨던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전긍긍 다급해하시는 아버지를 종종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허가와 선처를 의뢰하고, 판결과 취업을 청탁하고, 진급과 지도편달을 부탁하셨을지 모른다. “깨끗한 거절은 절반의 선물”이라는 아버지 말씀 속에서, 깨끗한 거절이야말로 청탁할 수밖에 없는 상대방을 덜 비루하게 하고 덜 상처 받게 하려는 배려이기도 하다는 걸 알아챈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어떠한 거절에도 덜 상처 받으려는, 부탁하는 자의 자존심이기도 하다는 것도.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말씀은 부탁을 많이 해 본 자의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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