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가정법원장과 사법연수원장을 지내고 사회적 약자 변론에 힘썼던 법조계 원로 기세훈 전 인촌기념회 이사장(사진)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101세.
1914년 지금의 광주 광산구 광곡마을에서 출생한 고인은 일제강점기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42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법관 임용에서 배제됐고 이후 독립운동가 변호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불령선인(不逞鮮人·불순한 사상을 가진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태평양전쟁 말기 탄광 노동자로 징용될 뻔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후 서울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2006년 변호사를 은퇴할 때까지 61년을 법조계에 투신했다. 1949년 광주지검 차장검사로 재직하며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좌익 누명을 쓴 박찬길 검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 ‘의혈검사’로 불리기도 했다. 1954년부터는 전남대 초대 법과대학장을 맡으며 6년간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61년 청주지법원장에 임명되며 다시 법복을 입은 뒤 초대 서울가정법원장, 초대 사법연수원장을 지냈다.
하지만 1971년 ‘대법관 코스’였던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할 때 정권에 밉보인 판사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후 전국 153명의 판사가 집단사표를 낸 ‘사법파동’을 맞았다. 3선 개헌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달이었다. 고인은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비장한 각오로 사법 파동 해결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하며 서울고법 전체 법관 명의로 사법권수호 결의문을 전달했다. 이 일로 정권의 눈 밖에 난 그는 1973년 법관 인사에서 대법원 판사 9명과 함께 의원면직 처리됐다.
퇴임한 뒤엔 서민을 위한 무료변론, 국선변호인 활동 등 ‘약자들의 변호사’로 일했다. 유신정권 시절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가 구속된 한승헌 전 감사원장을 변호하고, 한국가정법원 개척자답게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윤리도덕 되찾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89년 인촌기념회 이사장으로 선출돼 11년간 재임했다. 고인은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당대 이기론을 이끌었던 고봉 기대승 선생의 13대손으로 직접 ‘고봉의 문집과 번역’이라는 4권짜리 성리학 이론서를 펴냈다. 선조 때부터 내려온 광주 소재 고택 ‘애일당(愛日堂)’에 학술원을 열고 학술지인 ‘전통과 현실’을 펴내며 고봉의 학문 연구에 힘써왔다.
유족은 아들 춘석(한양대 의대 명예교수) 백석 씨(중앙대 의대 교수), 사위 김병교(전 항공우주연구원 연구위원) 정승기(영진건재 대표) 신동우 씨(아주대 건축학과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 중앙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이며, 발인은 25일 오전 6시. 장지는 광주 광산구 광산동 선영하. 02-860-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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