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찐 엄마, 아이가 부끄러워할까 봐… 나도 몰래 주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2일 03시 00분


[2020 행복원정대/엄마에게 날개를]<9>전업 주부에겐 외모가 ‘명함’인가요

직장을 그만두고 6년째 아이 둘을 키우며 사는 전업주부 한모 씨(39)의 이야기를 일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올해 3월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백화점에 갔다. 기필코 마음에 드는 옷에 지갑을 열겠노라. 결혼 전에는 시간만 나면 쇼핑을 했다. 이젠 백화점에 가도 어느 매장에서, 어떤 옷을 골라야 할지 현기증이 난다. 원피스 한 벌이 눈에 띄기에 쭈뼛쭈뼛 매장에 들어섰다. 직원이 힐끗 쳐다보더니 다른 고객을 안내하기에 바빴다. 옷들을 뒤적여 원피스를 찾아냈다. 가격표를 보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분주히 돌아갔다.

“이거 사이즈 좀 주세요.”

“66은 입으셔야겠네요.”

‘오늘은 나를 위해 돈을 쓰겠다’고 다짐하며 탈의실로 들어갔지만, 엉덩이와 아랫배가 꽉 끼어서 볼품이 없었다.

“좀 작네요.”

“더 큰 사이즈는 없어요.”

둘째를 낳고 직장을 그만둔 지 6년째. 여자에겐 외모가 명함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운동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에 명품 가방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을 한 여자. 그건 바로 그 여자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 주는 명함이다. 진짜 명함이 없으면 더욱 그러하다. 회사 다닐 땐 “팀장님”이었는데 이젠 “아줌마”라고 불린다. 차림새가 헐렁하면 더욱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힐끗거리며 훑어보던 백화점 직원의 표정도 왠지 주눅 들게 했다. 나를 본 순간 오랜만에 쇼핑을 나온, 펑퍼짐한 여자가 결국엔 아무것도 사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직장에 다닐 때는 일찍 일어나 몸단장하는 일이 스트레스였다. 지금은 하루 종일 거울 한 번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애들 씻기고, 챙겨 먹이고, 집 치우고, 빨래를 돌린다. 애들 오면 다시 씻기고, 챙겨 먹이고, 뒷정리하고, 숙제를 봐 준다. 둘째를 낳고 몸무게가 늘기 시작하더니 결혼 전보다 10kg이나 불어났다. 출산 후 머리카락이 빠져 그냥 질끈 동여매고 산다. 아이가 긁힐까 봐, 해로울까 봐 손톱을 기르지도 매니큐어를 바르지도 않는다. 거칠어진 피부, 잔주름이 신경 쓰여 피부 관리실을 예약했지만 포기했다. 아이 둘을 맡기고 2시간을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길을 걷다 보면 치마를 입고, 머리를 찰랑이며, 손톱을 기르고, 목걸이를 길게 늘어뜨린 채 유모차를 미는 여자를 만난다. 아이는 다른 사람이 키워 줄 테고, 틈틈이 피부 관리와 손톱 관리를 받을 만큼 부유하다는 뜻이다. ‘팔자 좋은 소수’라며 지나치다 ‘내가 자기 관리를 못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든다.

첫째 입학식 날이 다가왔다. 결국 옷은 사지 못했다. 내 몸에 맞는 사이즈가 없거나, 비쌌다. 옷만 사서 될 일인가. 옷에 맞춰 가방도 들어야 하고 구두도 신어야 하는데, 내 몸에 그리 많은 돈을 쓸 엄두는 나지 않았다. 둘째를 임신하고 회사 다닐 적에 입던 임산부용 정장 원피스를 꺼냈다. 당시 들고 다니던 명품 가방도 꺼내 먼지를 털었다. 유행이 지났지만 딱히 대안이 없었다.

아이 교실에 들어갔다. 눈이 저절로 커졌다. 다들 세련돼 보였다. 꾸미지 않은 몇몇 엄마가 오히려 두드러져 보였다. 아이가 하굣길에 “엄마 창피해. 데리러 오지 마” 해서 펑펑 울었다던 친구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이가 뭘 알겠느냐”며 웃어넘기라고 위로했었는데, 내 차림새에 신경이 쓰여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사진은 어떻게 찍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열심히 살았다. 자신감을 갖자’며 마음을 다독였지만 자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입학식 날 이후, 운동을 시작했다. 아이를 학교와 유치원에 들여보내고 인근 공원을 뛴다. 쉽지 않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또는 다니기 위해, 이제는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여전히 ‘예뻐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아이 둘을 재워 놓으면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다. 내 또래인 아이 엄마, 탤런트 김희선이 여고생 교복을 입고 나오는 드라마를 봤다. 군살도 기미도 없이 예뻤다. 드라마가 끝난 뒤 양치질을 하며 세면대 거울을 보는데 코끝이 시큰해진다. 분주한 일상에 치여 살다 ‘나는 어디에 있나’라는 생각에 불쑥 서러워질 때가 있다. 오늘따라 남편의 늦은 귀가에 불안한 생각이 든다. 잠든 아이들을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나는 작아지고 아이들은 크고 있다. 조금 위로가 됐다.
■ 엄마도 예뻐야 한다고요?

“TV를 보다 보면 한숨이 나와요. 아이도 잘 키우면서 외모도 잘 가꿔야 하고요. 게다가 돈도 못 버느냐는 무언의 압력이 있죠. 엄마한테 요구하는 게 진짜 많은 것 같아요.” (강모 씨·39)

“‘배 나온 게 더 예쁘다’는 남편 한마디에 거울 속 내가 예뻐 보이더라고요. 엄마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면 ‘외모 스트레스’는 덜할 테죠.” (민모 씨·43)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전업 주부#외모#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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