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 어느 날 김대중(DJ)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 전화를 했다. 이영작 박사를 나에게 보낼 터이니 자세한 설명을 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정동채 비서실장이 이영작 박사 대신에 유종근 박사라는 재미교포를 데리고 왔다. 김 이사장의 소개 편지까지 가지고 왔는데, 나는 DJ가 새삼스럽게 이런 신임장까지 들려서 보낸 것이 의아했다.
유종근은 미국 럿거스대에 재직 중이었다. 그는 의아해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선생께서 1987년도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는데 매년 낙방을 했습니다. 금년에도 후보로 추천되었는데 여건은 좋지 않지만 우리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의원님이 이 운동을 추진하는 데 가장 적임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사실, 여러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이영작 박사와도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이 의원님이 정부의 장관도 지내셨고, 국제 분야에 경험도 많으시니깐 가장 적임자라고 총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죠?”
“우리가 하나의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활동하자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제가 있고 이영작 박사는 수시로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일하고 국내에서는 이 의원님께서 뒷받침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사실 나는 노벨상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주저하였지만 김 이사장의 간곡한 요청이란 말에 수락을 하였다.
얼마 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영작이 나를 찾아왔다.
“선배님, 저하고 노르웨이를 한번 다녀와야겠습니다.”
“아니,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불쑥 가면 어떻게 하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태가 약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최근 김영삼 대통령이 ‘마틴 루서 킹 비폭력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공로로 권영민 애틀랜타 총영사가 주노르웨이 대사로 영전되었습니다. 권 대사에게 은밀히 김영삼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작업을 추진하라는 임무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도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나도 작업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어리벙벙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노르웨이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문득 스웨덴 왕립의사회 회원으로 활동 중인 한영우 선배와 친구인 안데르스 비에르크 스웨덴 국회부의장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995년 4월 나와 이영작, 그리고 아태평화재단 미국 사무실 대표로 있는 스티븐 코스텔로가 오슬로로 떠났다. 잡음을 막기 위해 여행 사실은 일체 비밀에 부쳤다.
노벨위원회에 도착하니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신사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1990년부터 5년째 노벨평화상위원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예이르 루네스타였다. 1945년생으로 나보다 9년이나 연하였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이 겉보기로는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김영삼 정부의 남북관계와 DJ의 역할에 관한 문답이 오고간 뒤 그는 파일을 넘겨다보면서 마치 구술시험 하듯 물었다.
“풍문에 의하면 김대중 씨가 정계에 복귀한다는 설이 상당수이던데 어떻습니까?”
나는 속으로 ‘이제 본론이 나왔군’ 하고 생각했다. 우리가 예상하고 준비한 질문이었다.
“그분은 현재 현장정치에서는 손을 떼었지만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를 두고 여당에서는 정치에 간섭한다는 비난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국민으로서, 아니 야당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김대중 씨가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면 혹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세간의 주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겁니다.”
나는 긴장하였다. 이영작도 그랬는지 물컵을 집어 들었다.
“노벨 평화상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손꼽히는 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씨 정도로 관록 있는 정치인이라면 평화상을 이용하는, 그런 수준은 이미 지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김대중 씨처럼 일생을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헌신해온 분에게 평화상이 돌아간다면 오히려 노벨상의 명성이 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나의 목소리도 약간 떨린 것 같았다. 나의 주장이 그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노벨 평화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이렇게 찾아왔다고 시인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의 질문은 나의 자존심에도 일침을 가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재빨리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작년에 야세르 아라파트에게 상을 주었다고 심사위원 한 사람이 사임한 사실이 있을 정도로 (평화상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 점을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또 한마디 핵심을 찌르는 말을 했다.
“사실 김대중 씨는 1987년에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해 그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출마함으로써 한국의 야당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원망을 샀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평화상을 수여하였습니다.”
나는 이 말에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 “DJ 노벨 평화상 막아라”… 안기부 공작명 ‘산림정책’ ▼
1987년 노르웨이에선…
“오늘 산림당국자를 만나 언제부터 연구 활동에 들어가느냐고 물었고, 발표논문에 우리가 말하는 수종이 포함되었는지 문의했다. 논문에 그 수종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1987년 가을, 노르웨이 오슬로의 대한민국 대사관은 서울에 이런 전문을 보낸다. 산림청 주재관이 보낸 게 아니다.
‘산림정책’이라고 불린, 안기부의 김대중(DJ) 노벨평화상 저지 공작 전문(電文)을 예시해 본 것이다. ‘산림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벨위원회는 ‘산림당국’, 노벨상 심사는 ‘연구’, 수상 결과는 ‘논문발표’, 그리고 DJ는 ‘수종(樹種)’으로 명명됐다.
그러니까 예시한 전문을 풀어보면 “노벨위원을 만나서 알아본 바, 금년도 평화상 수상 대상자에 김대중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된다.
DJ가 1987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른 이후 역대 정권은 정보기관을 동원해 해마다 방해공작을 펼쳤다.
노르웨이 유력지 ‘베르덴스강’은 그해 9월 1일자로 “김대중은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근 대통령 출마 포기 선언을 교묘하게 번복한 인물이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물론 ‘산림정책’의 성과(?)인지는 속단할 수 없다. 하지만 노벨 평화상이 한국 대통령선거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 기사는, DJ의 수상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인 여론이 됐다.
김영삼(YS) 정권은 DJ에 대한 네거티브 캠페인보다 YS의 수상을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결과는 마찬가지이지만….
공작명은 ‘세종사업’. 애틀랜타 총영사로 있으면서 1995년 1월 YS의 마틴 루서 킹 비폭력평화상 수상에 결정적 역할을 한 권영민을 그해 3월 노르웨이 대사로 내보냈다. 또 안기부 파견관을 2명으로 늘렸다. 그중 한 명이 최종흡 참사관이었다.
한국외국어대를 나온 최종흡은 노르웨이에서 어학연수를 했고, 한 차례 근무까지 한 적이 있는 베테랑 요원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슬로의 이종찬 태스크포스는 권영민에게 연락을 취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종찬의 증언. “결론은 권 대사를 만나 사전에 우리 활동을 알림으로써 쐐기를 박아두자는 것이었다. 내가 연락하니 권 대사는 몹시 당황한 듯했다.”
대사관저에는 최종흡도 있었다.
“불필요한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사전에 알리지 않고 오슬로에 왔습니다. 현지에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권 대사는 최 참사관을 보면서 답을 했다.
“제가 알기로 노벨위원회는 대단히 접근하기가 어렵고…. 그리고 한국 대사가 직접 나서서 로비한다는 소문이 나면 오히려 역효과를 보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종찬이 돌아간 직후 최종흡은 서둘러 평소 교분이 있던 야코브 스베르드루프 전 노벨위원회 간사 겸 노벨연구소장을 만난다. “김대중은 정계 복귀할 인물이며 노벨 평화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얘기를 예이르 루네스타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에게 꼭 전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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