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지석의 ‘사마왕’, 일본서기 기록과 완전 일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2일 03시 00분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6>日서 태어난 백제 무령왕

1971년 무령왕릉 발굴과 함께 출토된 석판 지석. 가로 41.5cm, 세로 5cm, 두께 3.5cm인 석판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점선 안 한자)이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고 적혀 있다. 이 지석을 통해 지석의 주인이 무령왕임이 밝혀지게 됐다(위쪽 사진). 아래쪽 사진은 무령왕릉 내부 평면도. 입구로 들어가 벽돌로 축성한 좁고 어두운 널길(연도)을 따라 들어가면 좀 더 넓은 널방(묘실)이 나오는데, 이곳에 무령왕과 왕비의 관이 놓여 있는 구조다. 동아일보DB
1971년 무령왕릉 발굴과 함께 출토된 석판 지석. 가로 41.5cm, 세로 5cm, 두께 3.5cm인 석판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점선 안 한자)이 나이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고 적혀 있다. 이 지석을 통해 지석의 주인이 무령왕임이 밝혀지게 됐다(위쪽 사진). 아래쪽 사진은 무령왕릉 내부 평면도. 입구로 들어가 벽돌로 축성한 좁고 어두운 널길(연도)을 따라 들어가면 좀 더 넓은 널방(묘실)이 나오는데, 이곳에 무령왕과 왕비의 관이 놓여 있는 구조다. 동아일보DB
옛 문헌에는 백제인들이 왜(倭)로 갈 때 이용하던 주요 해상로로 쓰시마(對馬)∼이키(壹岐)∼가카라시마(加唐島)를 표지(標識) 섬으로 삼고 갔다는 기록이 많다.

2년 전인 2013년 6월 일본 규슈 국립박물관은 한일 역사학자들을 모아 옛날 백제인들과 왜인들이 오가던 이 바닷길을 검증하는 시도를 했었다. 그 결과 문헌 기록이 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실제 이키 섬을 출발하면 앞에 보이는 섬은 가카라시마뿐이다. 가카라시마는 수천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갈 때 나침반 역할을 했던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섬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먼 옛날에 어떤 여인이 이 섬에서 아기를 낳고 샘물을 마셨다, 그때 태어난 아기는 훗날 매우 귀한 분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 그 ‘귀한 분’이 바로 ‘백제 무령왕’이라는 기록이 나오게 된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461년 4월 백제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년)이 일본 유랴쿠 천황(雄略天皇·재위 456∼479년)에게 백제 여인을 왕비로 추천해 보냈는데 그녀가 입궁하기 전 간통한 사실이 알려졌다. 유랴쿠 천황은 그녀를 죽인다.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분노한 일왕을 달래고 나라 운영을 보좌하라고 지시한다. 곤지는 ‘임금의 명은 어길 수 없지만 형님의 여인(군부·君婦)을 주시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개로왕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내주며 ‘여인이 산달이 가까워오고 있다. 만일 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부디 배에 태워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여라’라고 했다.

개로왕과 곤지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곤지는 왜로 가는 항해에 나선다. 그러다 결국 임신한 여인이 곧 산통을 느꼈고 배는 가카라시마에 정박했다. 곧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의 이름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사마(斯麻)’라 하였다. 일행이 배 한 척을 내어 아이를 돌려보내니 이가 곧 무령왕이다.”

일본어에서 한자 ‘사(斯)’는 ‘시’로 발음되기 때문에 시마 왕으로 읽으며 이는 곧 섬에서 태어난 ‘도왕(島王)’이라는 뜻이다.

일본서기의 내용들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특히 왜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동생을 보내면서 임신한 자신의 부인을 딸려 보냈다는 대목은 현대적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현구 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창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한국과 일본에는 임신한 부인을 총신(寵臣·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개로왕이 임신한 부인을 동생 곤지에게 하사했다는 기록도 못 믿을 이유가 없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발굴된 무령왕릉 지석에 무령왕 이름이 ‘일본서기’와 완전히 일치하는 ‘사마(斯麻)’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곤지가 일본으로 가는 길에 태어난 아이가 무령왕이라는 이야기나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난 뒤 귀국해 즉위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시계를 돌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는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그해 7월 한여름 전국은 긴 장마로 신음하고 있었다. 삼국시대 백제 고분군이 밀집해 있던 충남 공주시 서북쪽 송산리(오늘날 금성동) 언덕에서는 문화재 발굴단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7월 6일 배수로 공사를 하느라 무심코 땅을 파던 한 인부의 삽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손으로 헤집어 보니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이었다. 그런데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금씩 더 파고 들어가 보니 이 벽돌은 거대한 아치형 구조물의 일부였다. 처음엔 다들 기존에 발굴한 6호 고분의 연장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조물이 또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을 알고 현장은 충격에 빠진다.

1971년 7월 8일 발굴단이 무령왕릉 입구를 막은 벽돌을 치우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워낙 서두르다 보니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와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다. 동아일보DB
1971년 7월 8일 발굴단이 무령왕릉 입구를 막은 벽돌을 치우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워낙 서두르다 보니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와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은 것이 전부였다. 동아일보DB
이튿날 서둘러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여 문화재관리국 학예직들로 발굴단이 구성되어 공주에 집결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자 무덤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는 벽돌 구조물로 막혀 있었고 그 틈을 석회가 단단히 봉하고 있었다. 석회를 제거하고 입구 아래까지 내려간 시간이 오후 4시.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겠으나 백제 왕릉급이 분명해 보이는 옛 무덤 앞에서 발굴단은 왕의 영면(永眠)을 방해하는 것을 사죄하는 위령제를 올렸다. 위령제라고 해봐야 흰 종이 위에 북어 세 마리, 수박 한 통, 막걸리를 올려놓는 게 전부였다.

맨 윗단의 벽돌 두 장을 제거하는 순간 마치 한증막처럼 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1400년 넘게 밀폐 상태로 있던 무덤 내부의 찬 공기가 바깥의 더운 공기와 만나 일어난 현상이었다.

숨을 죽이고 들어간 발굴단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컴컴하고 깊은 연도(羨道·고분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였다. 연도 중간쯤 엽전이 올려져 있는 석판으로 다가가자 석판 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

발굴단은 다시 한번 놀랐다. 사마왕은 다름 아닌 백제 무령왕(武寧王·461∼523)이었기 때문이다.(이상은 권오영 씨의 책 ‘무령왕릉’에 나온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무령왕릉이 14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긴장과 박진감이 넘친다.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의 고분이 파헤쳐지고 도굴꾼들이 활개를 치던 상황에서도 용케 완전한 형태로 살아남은 고분이 있다는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무덤의 주인이 꺼져가던 백제의 맥박을 다시 힘차게 돌려놓았던 무령왕이었다는 게 알려지자 한여름 전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당시에는 먹고살기에도 바빴던 형편이라 조상들이 남긴 숭고한 문화유산을 감당할 수준이 못 됐다는 게 권오영 씨의 말이다.

“지석(誌石)을 통해 무덤 주인이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발표가 나오자 현장은 집단 패닉 상태에 빠졌다. … 보도진들은 앞다투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무덤 안에 들어가 유물을 촬영하다가 청동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불상사마저 일어났다. 밀려오는 구경꾼들을 통제해야 할 경찰마저 ‘나도 한번 구경하자’며 앞장설 정도였다.”

하기야 그때만 해도 그만큼 중요한 유적을 우리 손으로 발굴 조사한 경험도 없을뿐더러 발굴 조사와 관련된 행정조치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을 터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 못지않게 무령왕릉 발굴 소식에 흥분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발굴 시점부터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이듬해까지 현장 답사기를 싣고 관련 심포지엄을 열면서 발굴의 의미를 찾고자 부산했다. 발굴 직후 아사히신문은 ‘백제 왕릉 발굴조사는 역사적인 대발굴’이라면서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 성왕의 아버지이면서 일본서기에도 이름이 나오는 백제의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판명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동시에 갑자기 일본인들의 눈길이 쏠린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무령왕이 태어난 섬 가카라시마였다. 기자는 이달 초 가카라시마를 향해 길을 나섰다.

:: 지석(誌石) ::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업적, 자손 등을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을 말한다. 무덤의 내역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고분 발굴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7회는 가카라시마 답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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