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떡 ‘설고’의 치명적인 맛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6일 03시 00분


[우리 역사 속 미식가 열전]허균을 사로잡은 백설기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나오는 ‘오정, 기대병가’ 원문.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나오는 ‘오정, 기대병가’ 원문.
“가림(加林)의 좋은 쌀은 옥처럼 흰데, 그대 집은 해마다 삼백 곡이나 수확하네, 밥 지으면 너무나 부드러워 조호(雕胡·중국 남방의 맛있는 쌀)보다 맛있고, 달고 기름져 한 숟가락이 금세 없어지네.”

허균(許筠·1569∼1618)이 지은 ‘오정, 기대병가(梧亭, 寄大餠歌)’란 시의 첫 구절이다. 이 시의 가림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맛있는 쌀을 창고에 가득 채우고 있던 ‘그대’는 바로 허균의 친구 오정 정용(梧亭 鄭鎔)이다.

아마도 허균이 정용의 집에 가서 맛있는 쌀밥을 먹었던 모양이다. 밥을 먹으면서 정용은 이 쌀로 떡을 만들면 참 맛있다고 하면서 만드는 방법도 알려줬다. 찬물에 하룻밤을 불려 둔 후 서리같이 가늘게 빻는다. 이 가루에 석밀(石蜜)과 부드러운 미나리를 섞고 큰 시루에 안친다. 십자 모양으로 칼집을 낸 다음에 약한 불에 슬슬 쪄낸다. 맛있는 냄새가 부엌에서 ‘인온(인온)’ 곧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만나듯이 뭉게뭉게 풍긴다.

집에 돌아온 허균은 정용의 떡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조용히 듣고 있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사실 가을에 흉년이 들어서 허균은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니 밥상에는 늘 풀뿐이었는데 떡을 해먹는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그런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용의 집 계집종이다. 대바구니를 덮은 사각 소반을 대청마루에 내려놓는다. 바로 정용이 말로만 했던 그 떡이다. 허균은 이 떡의 이름을 ‘설고(雪고)’라고 적었다. 지금 말로는 백설기다. 아들과 딸을 비롯하여 온 집안 식구들이 좋아서 난리가 났다. 체면도 차리지 않은 채 소반에 둘러앉아서 게걸스럽게 먹었다.

허균은 여기에서 시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솔직한 성격이 드러나고 말았다. 허균은 친구 정용에게 감사의 뜻으로 판서에게 ‘설고’를 가져가라고 제안한다. 그 판서가 ‘설고’의 맛을 보면 자신처럼 감동해 높은 벼슬과 녹봉을 줄 것이라고. 어찌 그뿐이겠는가. 그 감동은 자손에게도 이어질 것이라고. 허균은 내친김에 그 판서의 본관이 행주라고 밝혔다. 바로 행주 기씨(幸州 奇氏) 기자헌(奇自獻·1567∼1624)을 지목한 것이다. 기자헌은 광해군이 왕세자일 때 맹자를 가르친 스승으로, 허균이 이 시를 쓸 때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었다. 허균은 이 시의 마지막에서 기자헌이 아침이면 세자가 있는 동궁으로, 저녁이면 묘당(廟堂)인 의정부로 간다고 했다. 기자헌은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온갖 뇌물이 집에 가득 차서 허균의 말로 하면 값비싼 과일로 아침을 먹을 정도였다. 잦은 술 접대로 인해 술잔을 드는 팔목이 꺾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허균은 설고를 이용해 당시 세도가인 기자헌을 비판한 시를 지은 것이다.

기자헌의 아들은 허균에게 글을 배운 기준격(奇俊格·1594∼1624)이다. 광해군 즉위 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에 반대한 영의정 기자헌은 길주로 귀양을 갔고, 찬성한 허균은 1617년 12월 12일에 정2품의 좌참찬이 됐다. 아버지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기준격이 허균을 역모 혐의로 고발했다. 이 상소가 빌미가 되어 허균은 1618년 8월 24일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겨 죽었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흰떡#설고#허균#백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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