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9대 왕 숙종(1661∼1720)은 만 53세 때부터 복부 포만이 생겼다. 왕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데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다 보니 어의를 비롯해 왕의 건강과 관련된 사람들은 초비상이었다. 이런 숙종이 병중에도 여러 차례 맛있게 먹은 것이 어의(御醫) 이시필(李時弼·1657∼1724)이 올린 황자계혼돈(黃雌鷄餛飩)이었다.
황자계혼돈은 원나라 때 출판된 ‘거가필용사류전집(居家必用事類全集)’과 명나라의 이천(李천)이 지은 ‘의학입문(醫學入門)’ 등에서 위장이 나빠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노인을 위한 식치(食治)로 소개돼 있다. ‘혼돈’은 알밤만 한 크기로 피가 종이처럼 얇은 만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털이 누런 암탉인 황자계의 고기를 파와 함께 솥에서 삶아낸다. 밀가루로 얇게 피를 만든다. 잘게 자른 고기를 간장과 천초가루 등으로 양념하여 소를 만든다. 소를 피에 넣고 만두처럼 빚어 삶아 익힌다. 이것을 하루에 한 번 빈속에 먹으면 장부를 뜨겁게 해줘 얼굴색이 기름지게 된다.
이시필이 숙종에게 올린 ‘황자계혼돈’은 약간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혼돈 속에 들어갈 소를 만든다. 황자계 두 마리와 꿩 한 마리를 삶아서 발라낸 살코기와 송이 파 마늘을 잘게 채 썰어 기름장에 볶는다. 이것을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국자의 머리로 꼭꼭 으깬 후 양념을 하여 간을 맞춘다. 피는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밀가루 대신 메밀가루로 만든다. 가장 가는 체에 쳐낸 메밀가루를 반죽해 둥근 방망이로 종잇장처럼 얇게 민다. 작은 크기로 만들기 위해 대나무 통으로 피를 찍어낸다. 이 피에 소를 넣고 끓는 고기 국물에 살짝 데쳐 그릇에 담는다. 식초 간장 파 마늘을 넣어 양념한 고기 국물에 찍어 먹는다.
식욕을 잃은 숙종에게 황자계혼돈은 닭고기 꿩고기 송이의 맛이 어우러져 맛있고, 크기도 작아서 먹기에 부담이 없었을 것이다.
이 음식을 처음 만든 사람은 이시필이 아니라 사옹원(司饔院)의 창고지기 ‘고정상(庫城上·城을 정으로 읽는다)’ 자리에 있던 권타석(權\石)이었다. 사옹원은 왕실의 음식 공급을 담당했던 부서다. 권타석은 수라간(水剌間)의 요리사가 아니었는데도 이 음식을 잘 만들었고 이시필의 주선으로 수라간의 정식 요리사였던 숙수(熟手) 넉쇠(四金)와 박이돌(朴二乭)이 권타석에게 이 요리법을 배웠다.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해인 1719년 9월 12일에 황자계혼돈을 먹고 싶다는 말을 한 것으로 나온다. 이때 이시필은 1717년 숙종의 눈병을 치료하러 청나라로 파견됐다가 약을 만드는 데 실패해 귀국 후인 1718년 3월 22일 유배를 당한 상태였다. 숙종이 먹고 싶다고 말한 다음 날 올린 황자계혼돈은 권타석에게 요리법을 배운 넉쇠와 박이돌이 만들었을 것이다.
이시필은 유배지 북청에서 숙종의 승하 소식을 들었다. 숙종은 만 59세였던 1720년 6월 8일 배에 복수가 찬 상태로 세상을 떠났다. 이시필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조선 음식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 음식 중에서 노인에게 좋은 것만을 가려 뽑아 책을 만들었다. 그 책이 바로 ‘소문사설(-聞事說)·식치방(食治方)’이다. 권타석이 만든 황자계혼돈의 요리법도 이 책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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