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성이 난 큰 소가 섶과 꼴을 지고 사립문으로 돌진하다 문지도리에 걸려 멈추는 것과 같다. 눈을 부릅떠서 화가 난 듯하고, 뺨이 볼록하여 종기가 생긴 듯하고, 입술은 꼭 다물어 꿰맨 듯하고, 이(齒)가 빠르게 움직이니 무언가를 쪼개는 듯하다.”
도대체 어떤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을 쓴 사람은 조선시대 정조에 의해 팽을 당한 이옥(李鈺·1760∼1815)이다. 1792년 10월 17일 정조는 성균관의 유생이 쓴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유생 이옥의 응제(應製) 글귀들은 순전히 소설체를 사용하고 있으니 요사이 선비들의 습성에 매우 놀랐다.”(정조실록) ‘순정고문(醇正古文)’만이 제대로 된 문장이라고 여겼던 정조가 보기에 이옥의 글은 ‘패관소품(稗官小品)’과 ‘순용소설(純用小說)’이었다.
이옥은 성균관에서 쫓겨나 경상도 합천 삼가현까지 가서 양반에게 면제됐던 군복무의 벌을 받았다. 그 후 고향 남양(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돌아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문체로 세상 사는 이야기를 썼다. 앞서 소개한 글 역시 남양에서 쓴 ‘백운필(白雲筆)’ 하편 ‘담채편(談菜篇)’에 나온다. 글의 제목은 ‘와거(와거)’, 곧 상추다.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상추쌈밥 먹는 모습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한 사람은 단연 이옥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상추쌈 먹기 좋은 때로 한여름에 단비가 처음 내린 후를 꼽았다. 비를 흠뻑 맞은 밭에는 마치 푸른 비단 치마처럼 상추가 솟아오른다. 잘 자라라고 인분을 잔득 뿌렸기 때문에 물을 채운 큰 동이에 오랫동안 담갔다가 깨끗하게 씻어내야 한다. 이옥은 상추쌈 먹는 법을 이렇게 묘사한다.
“왼손을 크게 벌려 구리쟁반처럼 들고, 오른손으로 두텁고 큰 상추를 골라 두 장을 뒤집어 손바닥에 펴놓는다. 흰 밥을 큰 숟가락으로 퍼서 거위 알처럼 둥글게 만들어 잎 위에 놓는다. 윗부분을 조금 평평하게 한 다음 젓가락으로 얇게 뜬 밴댕이회를 집어 노란 겨자장에 한 자밤 찍어 밥 위에 얹는다. 미나리와 어린 시금치를 많지도 적지도 않게 밴댕이회와 나란히 놓는다. 가는 파와 날 갓 서너 줄기는 그 위에 눌러 얹는다. 여기에 방금 볶아낸 붉은 고추장을 조금 바른다. 오른손으로 상추 잎 양쪽을 말아 단단히 오므리는데 마치 연밥처럼 둥글게 한다. 이제 입을 크게 벌리는데, 잇몸을 드러내고 입술을 활처럼 펼쳐야 한다. 오른손으로 쌈을 입으로 밀어 넣으면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친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그는 “이런 모양으로 느긋하게 씹다가 천천히 삼키면 달고 상큼하여 정말로 맛이 좋아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반드시 밴댕이회와 겨자장, 그리고 볶은 고추장을 곁들일 필요는 없단다. 서해 근처에 살았던 이옥은 황석어·굴·청어도 즐겨 먹었다. 겨자·생강·고추와 같은 매운맛을 좋아하는 자신의 식성을 ‘천성(天性)’이라고도 했다. 성균관 유생 때 술집에서 연거푸 서너 잔의 술을 마시고서 시렁 위의 붉은 고추를 집어서 씨를 빼내고 된장에 찍어 씹어 먹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옥을 탐식가로 보면 오해다. 농부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밭에서 채소를 가꿀 정도로 미식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꿰뚫고 있었다. 미식이 난리법석인 요사이 이옥의 이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식(耳食·귀로 먹는다)을 많이 한다. 이런 탓에 명성에 기댈 뿐 맛을 잘 알지 못한다.” <끝>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