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기자의 문학뜨락]문학-우정-시대에 대한 고민까지 절친에게 띄운 가슴으로 쓴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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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김현이 동료 평론가 김치수에게 보낸 편지.
문학평론가 김현이 동료 평론가 김치수에게 보낸 편지.
“나는 요즈음 랭보를 번역하고 있다. 연구비를 받으면 염상섭에 대한 논문을 쓸 것이다. (…) 우리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더라도 부족하다. 제기랄… 이 편지를 쓰는 나는 오늘 소주 먹고 취했다.”

편지를 쓴 날짜는 1974년 2월 8일, 받는 사람은 치수, 보내는 사람은 김현(사진)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창립 주역인 ‘문지 4K’ 중 두 사람,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과 김치수(1940∼2014)다. 고교 3학년 때 프랑스어학원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울대 불문과에 함께 입학했다. 서로에게 지음(知音)이자 문우(文友)였다.

다음 주 출간 예정인 문학전문지 ‘쓺-문학의 이름으로’ 창간호를 통해 공개되는 이들의 편지를 미리 만났다. 1974년 2월부터 1976년 2월까지 2년 동안 나눈 글이다. 친구에게 털어놓는 속 얘기, 문학에 대한 생각,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는지에 대한 지적 편력, 당시 현실에 대한 암울한 심정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김현은 편지에서 “광남아”(김현의 본명은 김광남)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김치수를 향해 “쓸데없는 잡일에 너무 몰리니까, 씨팔, (…) 한두 달 전연 신경질을 안 냈는데, 이제 슬슬 신경질이 나고”라며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또 “네가 잇몸을 온통 드러내고, 히히 웃으며 김포공항에 내릴 날만을 기다린다”며 그리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롤랑 바르트, 츠베탕 토도로프, 루이 알튀세르 등 철학자, 문예이론가, 사회학자의 저서를 읽고 든 생각들도 적혀 있다.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고, 어떻게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라는 구절에선 지극히 사적인 대화 뒤에 드리워진 어두운 시대적 배경이 짚어진다. 폭넓은 독서량을 기반으로 적확한 작품 분석과 섬세한 문체로 한국문학에 비평의 시대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 평론가 김현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생전에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낸 제자이자 소설가인 이인성 씨는 “선생에게서 술을 배웠고 죽음을 배웠다”고 했다. “술은 ‘사람의 혀를 불태운다’(김현 ‘불꽃의 말’). 현실에서는 뜨거운 인간관계를, 문학에서는 타오르는 상상을 만들어내는 힘이 된다. 선생의 마지막 순간들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답게 살아 있으려 한 그 모습들을 잊을 수가 없다.”

제자 이성복 시인은 또 어떤가. 그는 “선생에게서 배운 게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생은 (내 얘기를) 들어주셨다”고 덧붙였다. 제자들에게 비친 김현의 모습이 어떠했든, 한국문학의 독보적 문인들에게 고인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만한 고백들이다.

김현 25주기를 맞아 그의 제자와 후배들이 세운 사단법인 ‘문학실험실’이 22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문학포럼을 연다. 발제를 맡은 조재룡 고려대 교수는 김현이 1970년대 중반 이후 발표한 글들을 언급하면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무엇에 대해 고통하는가’와 같은 제목의 글들은 김현이 문학에 대한 물음들을 항상 원점에서 상황과 변화를 따져본 이후 다시 제안하는 일에 매달렸음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40년 전의 평론가가 던진 이 물음들은 지금도 똑같이 유효하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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