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663년 백제와 연합한 백촌강 전투에서 패한 뒤 적으로 싸웠던 신라와 당이 한반도를 장악하게 되자 한반도와 연결된 끈이 끊어져 버린다. 이미 많은 백제인이 건너가 일본 왕실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도래인들 입장에서 신라는 적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668년 고구려까지 망하고 676년 통일신라가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등 동아시아 정세가 요동치자 본격적인 고대 국가 진입을 위해 에너지를 집중하던 일본은 통일신라와는 약간 거리를 두면서 중국(당·唐)을 향해 뻗어 나간다. 일본 문화사에서 나라부터 헤이안 시대까지 적극적으로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인 것을 두고 ‘당풍(唐風)’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로 일본은 중국 문화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언종과 천태종을 수입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불교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장보고이다.》
○ 일본 불교의 성지
일본어로 ‘야마(やま)’는 ‘산’을 뜻하는 일반 명사이기도 하지만 교토 북쪽 비예산(比叡山·히에이잔·848m)을 일컫는 고유 명사이기도 하다. 비예산은 ‘산’을 대표하는 고유명사가 될 정도로 영산(靈山)으로 통한다.
이 깊은 산속 심장부에 일본 불자(佛者)들이 성지순례 하듯 찾는 사찰이 있으니 ‘연력사(延曆寺·엔랴쿠지)’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일본에서는 천태종의 개창지이자 수많은 고승을 배출한 불교 성지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돼 있다. 이 절에는 고대 한일 교류를 보여주는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신라명신(新羅明神)을 모신 사당인 적산궁(赤山宮)과 장보고를 기념하는 비석이다.
연력사를 찾았던 4월 초는 봄이었는데도 함박눈이 내렸다. 절 지붕과 높게 뻗은 나뭇가지 위로 아침부터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연력사의 핵심 건물은 근본중당(根本中堂)이라는 법당이다. 안에 들어서니 그 유명한 ‘불멸의 법등’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절을 창건한 최징(最澄·사이초·767∼822)이 788년 불상 앞에 밝힌 기름등잔인데 전란에도 꺼지는 일이 없이 오늘날까지 무려 1200여 년이나 불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최징은 당대 최고 엘리트 승려였지만 어느 날 홀연 속세를 떠나 21세 때인 788년 비예산 산중에 암자를 짓고 수행에 전념하는데 이게 연력사의 출발이다. 12년간 은둔하며 수도 생활을 하던 그의 법력은 어느덧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니 간무왕은 그를 국사(國師)로 발탁한다.
최징은 왕실 생활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문물을 배우기 위해 804년 1년 국비유학생 자격으로 당나라에 파견된다. 그리고 천태산 수선사에서 계를 받고 귀국길에 많은 법전과 불구를 갖고 귀국한 뒤 비예산에서 천태종을 개창하기에 이른다.
○ 장보고와의 인연
장보고와 일본 불교의 인연은 최징의 제자이자 천태종의 2대조로 불리는 원인(圓仁·엔닌794∼864)에서 비롯된다. 원인은 838년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산둥 성 등주(登州) 신라방(新羅坊)에서 겨울을 나는데 이때 장보고가 창건한 절인 적산(赤山)에 있는 법화원(法華院)에 묵게 된다.
법화원은 산중 사찰이긴 했어도 토지를 갖고 있었고 매년 500섬이나 되는 쌀을 소출할 정도로 자급자족을 하는 등 꽤 규모가 컸다. 모든 예불 의식은 신라 풍속을 따랐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신라어로 모든 의식을 진행한, 한마디로 당나라 땅의 ‘리틀 신라’였다.
원인 스님은 법화원에 머물면서 장보고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는데 그를 대사(大使·외교관)로 부르며 글귀마다 존경의 염(念)을 가득 담은 것이 눈길을 끈다.
‘아직까지 대사를 삼가 뵙지는 못했습니다만 오랫동안 높으신 이름을 듣고 있었기에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해만 갑니다. … 저는 옛 소원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머물고 있습니다. 다행히 미천한 놈이 대사님의 본원의 땅(법화원)에 있습니다. 감사하고 즐겁다는 말 이외에 달리 비길 만한 말이 없습니다. 언제 뵈올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만 대사를 경모하는 마음 더해갈 뿐입니다.’(원인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수록된 것을 현대어로 고친 것)
그는 어떤 사연으로 이렇게 장보고에게 편지를 쓴 걸까.
○ 동방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당시 장보고는 신라를 뛰어넘은 동아시아의 영웅, 바다의 제왕으로 명성이 높았다. 당나라 사람 두목(杜牧)은 ‘번천문집’이란 책에서 그를 ‘명철한 두뇌를 가진, 동방의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장보고가 언제 어떤 경로로 당으로 건너갔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가 소장 직에 올랐다는 무령군(武寧軍)이란 중국 군단 이름이 805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전후로 추정된다. 중국에 있는 동안 장보고의 활동은 법화원을 세운 지금의 산둥 반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법화원은 그가 군대에서 물러난 뒤 해상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운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 머물고 있던 신라인들을 비롯해 자신의 고향인 서남해안 지방 해상세력과 일본 규슈 일대에 살고 있던 신라인들까지 규합해 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신라인들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황해 일대에서 해상 교통과 교류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장보고 선단(船團)이 가장 뛰어났다. 일본 사신이나 승려들도 중국에 갈 때는 장보고 선단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원인 스님 역시 당나라로 가고 올 때 마찬가지로 도움을 받았으며 중국에 머물 때에도 장보고가 세운 절에 머물렀다. 그는 장보고의 도움으로 그동안 받지 못했던 여행허가서까지 당 관청으로부터 받는다.
중국 여행을 마친 원인은 10년에 걸친 고행과 순례를 기록한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남기는데 이는 현장의 ‘대당서역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동양의 3대 여행기 중 하나로 꼽힌다.
○ 장보고를 잊지 않는 일본인들
고국으로 돌아온 후 일본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된 원인 스님은 죽을 때까지 장보고와 신라인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지 않았다. 법화원에 있던 것과 똑같은 신라명신상과 그림을 일본으로 모셔와 적산궁을 세우고 장보고를 추억했으며 입적 직전엔 제자 안혜(安慧·안에·천태종 4대조)에게 비예산 서쪽에 법화원과 비슷한 적산선원(赤山禪院·세키잔젠인)을 세우라는 유언까지 남긴다.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받아 선원을 건립하고 신라 신사를 지은 뒤 신라명신상도 모셨다. 현재 적산선원에서는 신라명신을 장수(長壽)와 재물 운을 관장하는 칠복신(七福神) 가운데 으뜸 신으로 섬기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비예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보고의 뚜렷한 흔적은 연력사 동탑 근처에 세워진 ‘청해진대사 장보고 장군 기념비’였다. 비석에는 ‘장보고는 신라, 당, 일본 해역을 모두 지배한 해상왕이었으며 원인 스님이 장보고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연력사에서 만난 이소무라 스님은 “장보고 장군은 우리 천태종과 연력사의 큰 은인”이라며 “교토에 살고 있는 장보고의 32대손이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다”고 전했다.
○ 씨(氏)를 ‘신라’로 바꾼 일본 최고 무사
비예산에는 장보고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장소가 있으니 연력사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동쪽(시가 현 오쓰 시) 산기슭에 세워진 삼정사(三井寺·미이데라)이다. 이곳에도 신라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있는데 이곳과 안에 모셔진 신라명신은 모두 국보로 지정돼 있었고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비불(秘佛)이었다.
삼정사를 창건한 사람은 천태종 5대조인 원진(圓珍·엔친)으로 그 역시 스승 원인처럼 장보고의 도움을 얻어 당나라를 오가며 불법을 공부했다. 원진 역시 삼정사를 세우면서 경내에 신라선신당을 짓고 신라명신을 안치해 장보고를 추억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절이 일본 사무라이 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 최고 무사로 일본 무사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1045∼1127)가 신라선신당 앞에서 성인식을 치르고 아예 성(姓)을 ‘신라(新羅)’로 바꾼 것이다. 신라명신의 가호를 받기 위해서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는 잇단 전투에서 연전연승했으며 죽어서는 선신당 뒷산에 묻혔다. 아직도 그의 묘지는 잘 보존되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도 장보고에 대한 재해석이 확산되고 있지만 9세기 동아시아 바다를 호령했던 장보고의 위상은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일 양국을 잇는 끈이 되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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