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윤문영 씨(67)는 마지막 출근을 하던 날 이렇게 직원들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수출입품 운송·물류업체의 오너였던 그는 15년 동안 운영하던 회사를 떠나야 했다. 경쟁 업체가 늘면서 일감이 반으로 줄어들었고 매출은 점점 감소해 젊은 직원들에게 회사를 맡겨야만 했다. 한평생 물류업계에 몸담았던 그로선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이달 15일. 윤 씨를 서울 영등포구 영산로 CGV영등포점에서 만났다. 흰색 반팔셔츠에 자주색 나비넥타이를 맨 그는 영화관을 찾은 손님을 향해 “안녕하십니까.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우렁차게 외쳤다. 그는 각종 안내 및 청결 관리 등을 담당하는 시니어 안내 요원(도움지기)으로 하루 6시간(오전 10시∼오후 4시)을 일하고 있다. ○ 눈높이 낮추니 일자리가 보였다
윤 씨는 회사를 나온 지 한 달 만에 재취업에 나섰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집 근처 사회복지회관에 나가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서 열린 시니어 취업박람회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본 CGV의 ‘시니어 도움지기’ 구인 공고에 지원한 윤 씨는 서류와 면접전형을 통과해 2012년 10월 이 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1년의 파트타임 근무 기간을 거친 후 2013년 이 회사의 시간선택제 근로자가 됐다. 윤 씨는 “전직 오너였다는 생각을 버리니 3개월 만에 재취업할 수 있었다”며 “월급(110만 원)은 적은 편이지만 퇴근 후 운동을 하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등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현재 이 회사에서 윤 씨와 같은 중장년 시간선택제 근로자는 총 62명이다. 김영미 CGV 서비스아카데미 과장은 “중장년 근로자들을 채용해 보니 젊은 직원들보다 성실하고 풍부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서비스 정신도 투철해 놀랐다”고 말했다.
최근 ‘100세 시대’를 맞아 은퇴 후 재취업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50, 60대가 늘고 있는 가운데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관심을 보이는 중장년들이 생겨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시간선택제 일자리 취업자 중 50대 이상 중장년 취업자(9월 현재)는 13.4%(50대 9.6%, 60대 3.8%)로 조사됐다. 30대(35.3%) 40대(21.6%)와 비교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비율이 점차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경기도의 한 체험학습장 직원이던 정유자 씨(59·여)는 지난해 10월 한 프랜차이즈 치킨 업체에 시간선택제 근로자로 재취업하는 데 성공했다. 98세 노모를 보살피면서 생활비도 벌어야 해 일을 쉴 수 없었던 정 씨는 이 회사에 시간선택제 근로자로 먼저 취업한 김성애 씨(53·여)의 소개를 받아 지원했다. 정 씨는 “업무 시간 6시간(오전 10시 반∼오후 4시 반)을 내가 선택할 수 있고 보험 가입 등 정규직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일할 맛이 난다”고 말했다.
○ 전일제 뽑던 기업도 시간선택제로
중장년들의 재취업을 기업들도 반기는 분위기다. 한국고용정보원이 50대 이상 중장년 근로자를 채용한 기업 인사담당자 482명을 대상으로 한 중장년 채용 설문에서도 ‘장년층에 적합한 업무가 있어서’(33.4%) ‘그간의 업무 경험과 기술 등을 살릴 수 있어서’(31.7%) 등이 높게 나타났다.
특히 전일제 위주의 채용을 하던 업체들 중에는 중장년 시간선택제 근로자 채용에 관심을 보이는 곳들도 적지 않다. 커피 박물관 및 레스토랑 운영 업체인 ‘왈츠와닥터만’이 대표적 사례다. 전직 대기업 임원, 교사, 정년퇴직한 유명 호텔 요리사 등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사는 50대 이상 중장년 위주로 채용을 하는 이 회사에는 현재 전체 직원 21명 중 11명이 50대 이상이다. 이 업체는 2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2015 리스타트 잡페어-다시 일하는 기쁨!’에 나와 바리스타 등 중장년 시간선택제 근로자를 처음으로 채용할 계획이다. 박종만 왈츠와닥터만 관장은 “시간선택제 근로자들을 채용해 노동 강도를 줄이고 업무에 대한 집중력을 더 높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도 점차 중장년층에 무게를 실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존의 중장년 전일제 근무를 시간선택제로 바꾸는 ‘전환형’ 확대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회사는 채용 등에 필요한 노무비를 줄이고 중장년 근로자는 퇴직 전 늘어난 시간만큼 제2의 인생을 준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중장년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구직자의 적극적인 재취업 준비도 필요하다. 전경련 중소기업협력센터의 ‘2015년 중장년의 재취업 인식 실태 분석’에 따르면 퇴직 전 재취업 준비를 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1032명)의 43%가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답해 준비했다는 응답률(33.4%)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시간선택제 질적 성장… 中企에도 확산” ▼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일을 통한 국민행복’이 가능한 노동시장이 되려면 근로자들이 공정한 보상을 받아야 하고,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해야 합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58·사진)은 1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용률 70%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인 국가들은 자녀 양육 시기에 부모 한 명이 시간선택제로 일하면서 아이를 돌보는 고용구조가 자리 잡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노동시장에서 시간선택제 일자리의 의미는….
“네덜란드는 전체 근로자의 40%가, 영국이나 독일도 20% 이상이 시간선택제로 일하고 있다. 우리도 197만 명에 이르는 경력 단절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출산, 육아 기간에 부부가 전일제, 시간선택제로 각각 일하는 ‘1.5인 고용모델’이 정착돼야 한다.”
―지난 3년간 시간선택제 지원사업을 평가하면….
“일자리의 질이 개선되고 있다. 3년간 시간선택제 근로자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24.6%포인트, 정규직 대비 시간당 임금도 6.2%포인트 올랐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으로도 성공 모델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성과다. 다만 가장 핵심 정책인 전환형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올해부터 본격 시작한 만큼 정착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시간선택제는 질이 낮다는 인식이 여전하다.
“지난달 스타벅스 시간선택제 근로자를 만난 적이 있다. 보육 때문에 경력이 단절됐다가 복귀한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이런 우수 사례를 널리 전파해 나가겠다. 인건비 지원 등 인프라도 더 구축하겠다.”
―정부 눈치를 보느라 공공기관이나 금융권이 ‘보여주기 식’으로 도입한다는 비판도 있다.
“지난해 도입한 신한은행은 고객, 근로자, 인사 담당자 모두가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등 정부 출연 연구기관도 시간선택제로 여성 연구원들의 경력 단절을 방지하고 있다. 노동시장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공공기관과 금융권에 시간선택제를 정착시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시간선택제 정착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점은….
“기업과 근로자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제도라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시간선택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바꿔 나가야 한다. 근로자들이 자신에게 맞는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찾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동아일보 리스타트 잡페어에서도 많은 분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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