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틀어박혀 취미에만 골몰하다 뚱뚱해진 몸, 거북이처럼 굽은 등, 안경 끼고 핏기 없는 허연 얼굴…. 과거에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던 ‘오덕후’의 모습이다.
2010년 초 tvN ‘화성인 바이러스’를 통해 방송에 처음 소개된 덕후의 모습이 그랬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덕후 이진규 씨가 나와 캐릭터 베개와 데이트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그의 별난 모습과 취미에 진행자 이경규는 “만화 속 캐릭터를 진짜 여자친구라고 생각하냐?”고 질문했고 이 씨는 “(캐릭터를 보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흥분된다”고 답했다. 방송 후 온라인에서 누리꾼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과 함께 ‘오덕후의 두 배’라는 뜻으로 ‘십덕후’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 ‘변태’가 아닌 능력자
하지만 요즘 덕후는 ‘화성인…’ 속 덕후와는 다른 모습이다. 지난 추석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송된 MBC ‘능력자들’은 다양한 덕후들을 ‘능력자’로 소개했다. 오드리 헵번 덕후로 출연한 바리스타 임정도 씨는 피규어 제작 기술을 공부해 직접 제작한 오드리 헵번 피규어를 선보였다. 방송에 출연한 헵번의 가족들은 “그동안 본 피규어 중 최고”라고 칭찬했다. 치킨 덕후로 나온 대학생 서보근 씨는 한 치킨업체 메뉴 개발 전문가와의 치킨 감별 대결에서 승리했다. ‘능력자들’은 정규편성이 확정돼 30일 녹화를 진행한다.
덕후를 특정 분야의 고수로 소개하고 ‘덕질’을 권장하는 프로도 있다. XTM ‘겟 잇 기어’에는 건담 플라모델, 스쿠터 등 각 분야의 덕후가 ‘장비 고수’로 출연한다. 이들은 전문 지식과 수집 물품을 자랑하며 그들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한 장비나 방법도 소개해준다.
덕후임을 숨기던 과거와는 달리 ‘덕질’ 이력을 공개해 이미지를 바꾸기도 한다. 데뷔 18년차 배우 심형탁(37)은 지난해 8월 방송된 MBC ‘나 혼자 산다’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도라에몽’ 덕후라고 공개한 뒤 독특한 개성을 인정받으면서 각종 예능프로에 출연하게 됐다. 지난달 개봉한 극장판 ‘도라에몽’의 한국어 더빙에 참여했고 최근 MBC ‘무한도전’에는 ‘뇌순남’(뇌가 순수한 남자)으로 출연했다. ‘능력자들’을 연출한 이지선 PD는 “‘오타쿠’나 ‘덕후’로 부르면 비하하는 것으로 여기던 과거와 달리 자신만의 ‘덕질’로 사회적 인정을 받거나, 덕질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 세상 밖으로 나온 덕후들
‘덕후’의 원조인 오타쿠도 원래 일본에서 비하의 의미로 사용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오타쿠 경제’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트렌드를 이끄는 전문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이 같은 조짐이 보이고 있다. 혼자만의 취미생활에 머무는 대신 ‘덕질’의 결과를 공유하고 상품 개발에 참여하는 등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치킨 동아리 ‘피닉스’는 회원 30여 명이 일주일에 한두 번 모여 치킨을 분석한다. 이들은 치킨 브랜드의 새 메뉴 개발에도 참여했다. 지난해 한 치킨 브랜드의 신메뉴 품평회에서는 “뿌려 먹는 소스가 특징인 치킨에 뼈는 사족”이라며 순살 옵션을 제안해 히트상품으로 만들었다.
공연계 덕후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연극 뮤지컬 갤러리(연뮤갤)’는 공연 제작사의 주요 모니터링 매체로 자리 잡았다. 공연 티저 영상이나 포스터, 출연진 공개 때마다 연뮤갤에 올라오는 의견을 가장 먼저 확인한다. 공연 관계자는 “연뮤갤이 적은 인원이지만 공연을 자주 보는 ‘큰손’으로 구성돼 공연 흥행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고 말했다. 뮤지컬 덕후인 ‘뮤덕’들에게 누적 관람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티켓 가격을 할인해 주는 마케팅은 일반화된 지 오래다.
○ 덕후들이 ‘변신’한 이유는
유통업계는 덕후의 주요 아이템으로 꼽히는 키덜트 장난감이 지난해 5000억 원대 시장을 형성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8372억 엔(약 7조8000억 원·2013년 기준)인 일본 오타쿠 시장 규모에 비해서는 작지만 성장률은 가파르다.
덕후들의 변화는 다원화된 사회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행복과 가치판단 기준이 다양해진 것이다. 배영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는 “부와 명예를 성공의 기준으로 여긴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 세대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고 만족을 느끼는 일에 보다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며 “피규어 수집 등 나이와 걸맞지 않다고 여긴 취미도 자기가 좋아한다면 존중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도 형성됐다”고 말했다.
전북대 사회학과 설동훈 교수는 “과거에는 제도를 통해 전문가로 인정받았다면 최근에는 전문가로 되는 길이 많아지고 있다”며 “한 분야에 깊게 빠져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가진 덕후도 학위만 없을 뿐 충분히 존중받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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