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귀한 손님들 올때마다 1000여명 숙소 새로 지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일 03시 00분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2부 조선통신사의 길]<3>아이노시마 섬의 통신사 접대

《 200여 년에 걸쳐 총 12차례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들은 한 번에 많을 때는 500명, 적을 때는 300명 내외였다. 통신사들의 여정은 여러 달 동안 바다를 항해하는 고되고 힘든 일정이었다. 목적지인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임무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는 온 길을 꼬박 되짚어 오는 일정이었다. 한양∼에도는 왕복 거리만 4000km가 넘어 한 번 사행길에만 8∼12개월이 걸렸다. 》

당시 돛을 단 범선으로 바다를 항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었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예기치 않은 풍랑에 배가 침몰하거나 심한 뱃멀미로 배 안에서 사투를 벌이는 일도 흔했다. 1764년 통신사 행의 최고 책임자인 정사(正使·사절단 책임자)로 선정된 정상순(鄭尙淳)의 경우는 “가지 않겠다”고 버티다 3년간 김해로 유배를 가기까지 했다.

○ 작고 아름다운 섬마을

총 12차례 일본행에서 쓰시마 섬까지만 갔었던 마지막 사행을 빼고 11번 왕복 모두 통신사들이 머문 섬이 있으니 후쿠오카에서 가까운 작은 섬 아이노시마(相島)였다. 일행들이 쓰시마 섬에 도착한 후 다시 바람이 순한 날을 택해 이키(壹岐) 섬을 거쳐 세 번째로 찾은 지역이다.

일단 아이노시마 섬에 도착하면 이후 항해는 바다의 변덕이 잦아드는 내해(瀨戶內海·세토나이카이)로 접어드는 가장 가까운 곳에 도착한 것이었기 때문에 통신사들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현지 전문가들은 “일본 본토의 첫 착륙지인 시모노세키(下關) 항이 가까운 데다가 외딴섬이어서 통신사에 대한 경비 보호에도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임진왜란 때 끌고 온 조선 도공들과 통신사의 접촉을 일절 차단키 위해 당대 최고의 조선 도공들이 모여 살았다는 후쿠오카 대신 아이노시마 섬으로 안내했다는 분석도 있다.

○ 곳곳에 한글 간판

아이노시마는 후쿠오카 시내에서 열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40여 분을 간 뒤 신구(新宮) 항에 도착해 다시 배를 타고 20분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섬이다.

신구 항에서 7.5km 떨어진 이곳은 둘레 6.14km, 면적 1.22km²에 불과한 초승달 모양의 작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집이라곤 포구 주변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고 그나마 산자락 아래 좁은 평지에 한일(一)자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방문객들이라고 해봐야 소일 나온 도심 낚시꾼들이 전부였다. 섬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는 데에도 2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에 내리니 포구 게시판에 ‘어서 오십시오’ 한글 간판을 비롯해 곳곳에 한글이 보였다. 간판들을 반가운 마음으로 보고 있노라니 400여 년 전 조선에서 방문한 손님들이 이곳에서 지금의 한류 붐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성대한 환영과 접대를 받았다는 흔적이라도 되는 듯 느껴졌다.

섬을 찾은 날은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섬은 고양이가 많아 ‘고양이 섬’으로도 유명한데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 300명 사는 마을에 수천 명 상륙

이날 안내를 맡아준 신구(新宮)역사자료관 니시다 다이스케(西田大輔) 학예사는 기자를 먼저 항구 방파제로 안내했다. 그는 방파제 두 개를 가리키며 “당시 조선통신사와 일본 쓰시마 섬에서 함께 온 호위 인력(일본인)들이 바로 저 방파제를 이용했습니다”라고 했다. 검은색 돌로 쌓아 올린 평범하고 소박해 보이는 방파제였지만 1682년 조선통신사만을 위해 이 작은 섬으로 3800여 명을 동원해 2개월에 걸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아이노시마 섬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인구 300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통신사들이 올 때면 섬 전체가 들썩였다. 니시다 학예사는 “500여 명에 달하는 통신사와 안내 경호를 맡은 쓰시마 섬 무사들을 비롯한 1000여 명의 수행 인원들, 아이노시마 섬이 속해 있던 후쿠오카 번 무사들까지 포함하면 주민의 몇 배가 되는 사람들이 섬에 가득했다”고 전했다.

1719년에는 통신사 환영을 나갔던 주민들이 풍랑을 맞아 60여 명이 익사한 사건도 있었다. 섬에는 그들의 묘지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통신사가 올 때면 가장 큰 고민이 숙박이었다. 요즘처럼 대형 호텔이 있는 것도 아니니 수백,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묵을 수 있는 숙박 시설을 장만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섬사람들은 통신사들이 올 때마다 객사를 새로 지었다. 게다가 통신사 안에서도 정사, 부사(부책임자), 종사관(감사 및 기록관) 등 신분이 제각각이어서 정사, 부사가 묵을 시설은 따로 짓는 등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건물을 짓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건축 자재부터 일행들이 먹을 식료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로 실어 나르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1682년의 경우 객사 신축을 위해 반입한 다다미만 931장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논문 ‘아이노시마의 통신사 접대’(윤지혜)에 따르면 보통 이 섬에서의 숙박은 왕복 여정 각각 1박이 예정되었으나 바람이나 파도, 조수간만 등의 일기 변화와 그에 따른 사건사고로 9일 이상 체류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1764년의 11차 사행 때는 무려 23일을 머물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을 하루 재우는 것만도 막대한 식량과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었을 텐데 체류 일정이 길어졌을 때 섬사람들이 얼마나 큰 부담을 치러야 했을지는 말할 것도 없겠다.

아이노시마 섬에서 1박을 했던 7차 사행(1682년)의 경우 후쿠오카 번이 쓴 비용을 항목별로 보면 식비가 31%, 물품비 27%, 숙소 건축비 23%, 인건비 16%, 부도건설비 1%, 기타 2%였다. 윤 씨는 논문에서 ‘총금액을 현재 환율로 환산하면 수백억 원이 나오는데 이는 번의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이런 재정 출혈까지 감수하면서 통신사 일행들을 접대했다’고 전했다.

○ 채소밭으로 바뀐 객사 터

1748년에 제작된 고지도 ‘아이노시마도(圖)’가 1995년에 발견되는데 서남쪽에 대규모 객사가 설치됐음이 확인되어 이곳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94년부터 1년 동안 신구 정(町) 교육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니시다 학예사를 따라 한적한 마을 골목길을 10여 분 걸어가자 터가 나왔다. ‘조선통신사 객관적’이라는 한자 아래 한글로 적힌 조그만 안내판만 서 있을 뿐 온통 채소밭에 불과했다. 다소 실망한 기색을 취재진의 표정에서 읽었는지 니시다 학예사는 우산을 채소밭 모퉁이에 꽂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발굴 장소가 도민들의 중요한 생활터전이라 조사가 끝난 후 다시 주민들에게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지점이 객사 나무 기둥이 있었던 곳입니다. 통신사가 머물렀던 객사의 실제 면적은 수천 평을 차지할 만큼 크고 웅장했습니다.”

그는 “발굴 작업 당시 다량의 고급 도자기와 나막신 등도 나왔다”며 “하얀 자갈도 무더기로 나왔는데 통신사 일행을 위해 만들었던 정원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됐다”고 했다.

“물이 귀한 작은 섬마을에 정원까지 만들었을 정도였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조선에서 온 손님들을 위한 관상용이자 정성의 표시였습니다. 정원 조성에는 최고급 자재가 쓰였고, 조경용 대나무는 에도에서 따로 운반해 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심지어 물을 공급하기 위해 우물도 새로 파고 물통을 실은 배를 30척가량 준비시켜 놓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신유한이 적은 사행기록인 해유록(海游錄)에는 ‘통신사들이 도착하는 날, 네덜란드산 최고급 비단 양탄자가 깔리고 인조견으로 만든 등(燈)을 117개나 단 풍광이 어찌나 화려해 보였는지 우리의 초파일 등불은 중들의 조그마한 장난 짓처럼 여겨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 터에서 발굴된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신구역사자료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 전시된 다양한 색감의 꽃무늬 사발, 바다 풍경을 담은 수묵화 접시, 아담한 술잔 등은 당시의 화려했을 접대 장면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저 도자기 식기에 담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 뒤 한밤에 정원을 산책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흡사 독백처럼 들리던 니시다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유리 진열관 너머를 보고 있자니 이 작은 섬마을에서 수백 년 전에 펼쳐졌을 한일의 교류 향연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아이노시마 섬=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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