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마다 ‘7·5·3선+3즙 15채’ 극진한 식사 예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1일 03시 00분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2부 조선통신사의 길]<5>시모카마가리 섬 접대

조선통신사 자료관인 고치소이치반칸에 복원 전시되어 있는 통신사 접대 만찬상. 실물 크기인 모형은 가로 10여 m에 달하는 전시관 한 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상에는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인 꿩고기를 비롯해 연어와 전복찜 등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고위급 통신사를 위한 1인분 식탁이다.시모카마가리=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조선통신사 자료관인 고치소이치반칸에 복원 전시되어 있는 통신사 접대 만찬상. 실물 크기인 모형은 가로 10여 m에 달하는 전시관 한 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상에는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인 꿩고기를 비롯해 연어와 전복찜 등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고위급 통신사를 위한 1인분 식탁이다.시모카마가리=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매년 10월이 되면 히로시마(廣島) 현 작은 섬마을에서는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이 열린다. 통신사들이 들렀던 일본 내 60여 곳이 하는 행사 중 당시 행렬을 가장 잘 구현한다는 평을 듣는다. 최근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행사가 끊어지기도 했지만 이 섬에서는 12년째 이어지고 있다. 히로시마 현 구레(吾) 시에 있는 시모카마가리(下蒲刈) 섬이다.

이 섬은 통신사들이 총 12차례에 걸친 사행(使行)에서 딱 한 번만 빼고 모두 들렀을 정도로 조선통신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섬마을 사람들은 그런 인연을 잊지 않고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조선통신사 자료관’을 운영하면서 한국인들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 접대가 단연 으뜸

섬은 히로시마 번이 관할했던 지역으로 통신사들이 내해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들른 곳이었다. 인구 3000여 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겨울에도 날씨가 따뜻하고 밀감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어서 거센 바닷길에 지친 통신사들에게는 이곳에서의 휴식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위로는 지극정성으로 맞았던 섬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통신사 일행 중 우두머리인 정사(正使)로 파견됐던 조엄(趙엄)은 ‘해사일기’(1763년)에서 “쇼군이 조선통신사와 동행한 쓰시마 번주에게 ‘어느 곳에서의 접대가 최고였느냐’고 묻자 번주는 ‘시모카마가리가 제일이었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기자는 올해 9월 18일 섬에 도착해 제일 먼저 들른 조선통신사 자료관인 고치소이치반칸(御馳走一番館·손님 대접관이란 뜻)에서 번주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식탁에 올려진 화려한 장식품. 시모카마가리=김정안 기자jkim@donga.com
식탁에 올려진 화려한 장식품. 시모카마가리=김정안 기자jkim@donga.com
○ 화려한 상차림

히로시마 도심에서 고속도로로 약 2시간 달리자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자료관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정사가 탔던 쌍돛의 배(길이 30m, 폭 10m)가 10분의 1 축소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모형만 보아도 멋스럽고 화려했으니 과거 이 배를 본 일본인들이 그 규모와 화려함에 탄성을 내질렀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오가와 에이지(小川英史) 학예사가 입구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일본에서 가장 화려하고 실감나게 통신사들을 대접한 증거(?)를 그대로 재현한 곳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했다.

자료관 안에는 실물 크기로 복원한 정사, 부사의 복장과 통신사 행렬도, 행렬 모형 등 다양한 시각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압권은 통신사들에게 제공되었던 상차림이었다. 오가와 학예사는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해 1988년 재현한 것”이라며 “요리 복원에 참가했던 한 일본 요리 전문가가 ‘현대 일본 요리의 시작을 이 상차림에서 보는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했다.

실물 크기인 모형은 가로 10여 m에 달하는 전시관 한 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상에 놓인 음식들을 보니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인 꿩고기를 비롯해 연어와 전복찜 등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족히 3, 4인분은 될 것이라 짐작했는데 오가와 학예사는 “고위급 통신사를 위한 1인분”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상차림은 지위에 따라 달랐습니다. 최고위급인 정사 부사 종사관에게는 아침과 저녁마다 7가지, 5가지, 3가지 요리가 순서대로 나오는 ‘7·5·3’ 상을 차렸고, 점심으로는 ‘5·5·3’ 상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이건 먹는 시늉만 하는 애피타이저고 이게 끝나면 국 3가지, 요리 15가지가 나오는 메인 음식을 내놨습니다.”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었던 황호는 ‘동사록(東사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물새를 잡아 깃털은 그대로 둔 채 날개를 펼친 상태에서 등에 금칠을 하고 과일과 생선, 고기 등에 모두 금박을 했다…(그릇도) 흰 목판 및 질그릇에 금은을 칠한 것을 쓰는데 끝나면 깨끗한 곳에 버리고 다시 쓰지 않았다.”

‘조선통신사와 음식’을 연구한 김상보 전 대전보건대 전통조리과 교수에 따르면 지역과 시점마다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시모카마가리에서는 보편적으로 정사, 부사, 종사관에게 아침과 저녁에는 7·5·3선(膳)과 3즙(汁) 15채(菜)를 올리고 점심은 5·5·3선과 3즙 15채를 접대하도록 했다.

김 교수는 “‘7·5·3선’이란 7가지 5가지 3가지 요리, ‘5·5·3선’은 5가지 5가지 3가지 요리를 차린 상차림이 차례로 나오는 것이고 ‘3즙 15채’란 3가지 국과 15가지 요리를 차린 상을 의미한다”며 “시모카마가리에서의 대접이 기록으로 제일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당시 에도 막부만 해도 자기들 연회 때 다이묘(大名·봉록이 1만 석 이상인 무사)에게는 ‘2즙 7채’, 고급공무원은 ‘2즙 5채’, 1천 석 이상은 ‘1즙 3채’, 500석 이상은 ‘1즙 2채’를 하도록 명하고 엄격하게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신사 삼사(三使)에게 제공된 ‘3즙 15채’는 지극 정성을 다한 파격적인 접대였다.

○ 메뉴 짜는 데만도 몇 달

화려한 상차림을 위해서는 좋은 식재료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시모카마가리 사람들은 닭 돼지 꿩 오리를 생포해 별도 ‘가축우리’를 만들어 보관했을 정도였다. 오가와 학예사는 “날개 달린 짐승을 산 채로 잡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며 “맘에 드는 꿩이 잡히지 않자 히로시마 번주가 지금 한국 돈으로 치면 마리당 150만 원이라는 큰돈을 꿩값으로 내걸었을 정도”라고 했다.

물(水)도 중요했다. 지금 이 섬은 2000년 육지와 연결된 다리가 건설되어 자동차로도 들어올 수 있지만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당시엔 물을 비롯한 모든 식자재가 귀했을 것이다. 오가와 학예사는 “조선에서 오신 귀한 손님들을 위해 100여 척의 배를 이용해 멀리 히로시마 우물에서 물을 실어왔을 정도”라고 했다.

‘히로시마 번·조선통신사 내빙기(來聘記)’에 따르면 섬 주민들은 통신사 도착이 예정된 9월 전부터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1월에는 쓰시마 섬으로, 3월과 6월에는 아이노시마 섬을 비롯한 인근 통신사 방문지를 답사해 통신사들이 좋아했던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을 조사하고 술과 안주는 무엇이 적당한지 등 세세하게 탐문했다.

정보 수집이 끝나면 인근 37개 정과 촌에서 수백 명을 징발해 청소하는 사람, 물 나르는 사람, 불 때는 사람, 등불 켜는 사람, 소 돼지 닭 돌보는 사람까지 정해 일을 맡겼다.

시모카마가리 섬 사람들은 통신사들이 숙소 이외 장소에서도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쌀 등 잡곡에서부터 해산물 채소류 양념류 등 각종 식품 재료들을 직접 제공했는데 이는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에도 시대 일본은 가축이 귀하기도 했지만 불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까지 육식이 금지되었는데 통신사들이 묵는 사찰의 경우엔 ‘흑문(黑門)’이라는 별도 출입문까지 만들어 고기를 운반했을 정도였다.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식재료들은 ‘5일하정(五日下程)’이라 하여 5일에 한 번씩 제공되었는데 그 양이 하도 많아 1636년 통신사들의 경우 강에 버렸을 정도였다고 한다(황호 ‘동사록’).

○ 통신사를 극진히 예우하라

섬사람들은 이런 융숭한 접대와 별도로 통신사 예우에 대한 세부조항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주지시켰다. 1748년 시모카마가리 조선통신사 접대 총책임자 오카모토 다이쇼가 작성한 ‘히로시마 번 조선통신사 내빙기 4’에 따르면 △비좁은 길에서 조선통신사나 쓰시마 번주 등 통신사 일행을 만났을 때는 길을 비키고 △조선통신사에게 붓이나 글을 요구하지 말 것이며 △식사에 대해서도 규정한 것 이외에는 권하지 말고 △집을 청소하고 깨끗한 옷을 입어 통신사가 일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떠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접대’ 뒤에는 막대한 비용 지출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시모카마가리에서 통신사 대접에 쓴 비용만 3000냥(1636년 기준)으로 현 시세로 환산하면 12억∼14억 엔(약 114억3000만∼133억8000만 원)이라는 분석도 있다. 막부의 가신이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일본 조정에서 천자의 사자를 대접하는 데도 이러한 사례가 없다”고 간소화를 요구했지만 조선통신사에 대한 극진한 대접은 오랫동안 계속됐다.

시모카마가리=김정안 기자 jkim@donga.com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한일#韓日#수교#교류#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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