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제2부 조선통신사의 길]<8>통신사들이 존경했던 벳슈 소엔 스님
《 일본 교토를 대표하는 사찰로 상국사(相國寺·쇼코쿠지)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금각사 은각사도 이 절의 말사(末寺)이다. 상국사에 붙어 있는 분원(分院)으로 자조원(慈照院·지쇼인)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사찰은 18세기 조선통신사 유물을 대거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사찰은 통신사와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인데도 통신사들이 남긴 각종 시문(詩文)과 서화 100여 점을 보관하고 있다. 여기엔 9대 주지를 지낸 벳슈 소엔(別宗祖緣·1658∼1714)의 조선인들에 대한 남달랐던 애정이 숨겨져 있다. 》
○ 창고 속에서 나온 통신사의 흔적들
이상 더위로 낮 기온이 섭씨 30도에 육박하던 4월 23일 교토 북쪽에 있는 자조원을 찾았다. 사찰은 윤동주와 정지용이 유학해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동지사(同志社·도시샤)대학에서 가까웠지만 상국사와는 10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독립적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길을 헤매느라 지각을 하고 말았지만 주지 히사야마 류쇼(久山隆昭·73) 스님은 따뜻하게 기자를 맞아주었다.
교토 5대 선종 사찰(京都五山) 중 하나인 상국사는 한때 132만2300m²(약 40만 평)의 부지를 보유한 큰 절이었지만 분원인 자조원은 작은 정원, 본관 건물, 창고 1개로 매우 아담하고 소박했다. 규모는 작지만 정원과 본관 모두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해 스님과 신도들이 얼마나 공들여 관리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스님은 기자에게 정원에서 직접 길렀다며 따뜻한 녹차를 내주었다. 시중에서 파는 일반 녹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맛이 느껴졌다.
그는 10대 후반 출가해 수십 년간 선대 주지였던 숙부로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았고 1980년 숙부가 타계하면서 이어받았다. 그는 1982년 3월 중순 어느 날 창고 청소를 하다가 통신사들이 남긴 흔적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그의 말이다.
“며칠 전부터 절 뒤편 창고에서 흰개미 떼가 들끓기 시작한 겁니다. 물건이 썩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해 창고 정리를 시작했지요. 한참 동안 잡동사니와 쓰레기를 치우는데 가장 안쪽에서 오래된 후스마(襖·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 실내 문에 덧대는 일종의 중문)가 나온 거예요. 수북하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니 한눈에도 진귀해 보이는 각종 시와 그림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세어보니 59점에 달했습니다.”
보통 물건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아본 그는 이것들이 100여 년 전 일본에 왔던 조선통신사들이 남긴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통신사 연구에 명망이 높았던 재일교포 사학자 신기수 선생(1931∼2002)을 수소문해 만나게 된다. 마침내 신 선생으로부터 병풍이 1711년(숙종 37년)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일행과 자조원 9대 주지였던 벳슈 소엔이 교류한 흔적임을 확인했다. 그들의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졌던 것일까.
○ 자유로웠던 화풍(畵風)
당시 일본을 방문했던 통신사는 영조 때 우의정까지 오른 평천 조태억(1675∼1728)이 이끄는 일행이었다. 약 400명의 통신사는 에도 막부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1662∼1712)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1711년 5월 일본에 왔다가 벳슈 스님과 인연을 맺는다.
탁월한 학식과 뛰어난 시문 능력을 지녀 일본에서도 유명했던 벳슈는 통신사가 대마도에서 에도(현 도쿄)로 향할 때 오사카, 교토, 에도로 이어지는 구간을 동행하며 안내와 접대를 맡았던 ‘접반승(接伴僧)’이었다. 히사야마 스님은 “창고에서 나온 병풍틀이 다 썩어있어서 새로 틀을 만들어 그림과 시를 붙여 원형을 복원하려 했다”며 기자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직접 확인한 그림과 시문들은 고미술에 문외한인 기자의 눈에도 남달라 보였다. 우리가 흔히 보는 직사각형 한지가 아니라 부채, 매화, 살구꽃, 복숭아, 다각형 등 다양한 모양으로 오린 종이에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린 것들이어서 생동감 있고 자유롭게 느껴졌다.
히사야마 스님은 “일본 전통 유물 중에는 이런 특이한 형태의 종이에 글과 그림이 있는 유물이 거의 없다”며 “당시 통신사들의 예술적 감각과 창의성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꼬장꼬장하던 조선 선비들이 꽃 모양으로 종이를 오리고 그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고미술 분야 권위자이며 자조원 병풍 도록작업에 참여했던 홍선표 이화여대 교수(미술사학)는 “그림, 글씨, 탁본, 도장 등을 붙인 병풍을 백납병풍(百衲屛風)이라 한다”며 “숫자 백(百)과 누더기 옷을 뜻하는 납(衲)을 결합한 단어로 수많은 그림을 마치 누더기 옷을 깁듯 겹쳐 붙여놓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는 “자조원 병풍은 18세기 조선 서화의 일본 내 유입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또 다른 유물 ‘한객사장’
자조원에는 통신사 일행이 벳슈 주지에게 남긴 약 100점의 시를 총 4개의 두루마리 형태로 모아놓은 ‘한객사장(韓客詞章·조선에서 온 손님들이 남긴 감사의 글)’이라는 귀한 물건도 있었다. 두루마리들은 세로 21cm, 가로 48cm, 높이 21cm의 나무상자 속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 상자 안쪽에는 ‘1711년 벳슈 소엔이 쇼군의 명을 받들어 한국인들을 접대하며 주고받은 허다한 시편이 있어 세상에 출판하였다. 이를 4개의 두루마리로 만들어 영구히 보관한다’는 벳슈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히사야마 스님은 2009년 3월 부산시,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와 손잡고 소장 유물을 형태, 연대, 인물별로 분류한 뒤 이름과 번호를 붙인 도록을 발간했다. 제작에는 정경주 경성대 교수(한문), 조강희 부산대 교수(일어일문), 다와타 신이치로 일본 히로시마대 교수 등 한일 학자들이 두루 참여했다. 18세기 한국과 일본의 교류 흔적이 21세기 양국 지식인들의 교류로 이어진 것이었다.
‘한객사장’ 중에는 통신사 일행이던 이현과 이방언이 남긴 벳슈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시도 보였다.
‘문안 인사 자주 옴이 놀랍거니와/맑은 시 기쁘게 다시 보노라니/새벽 종은 옛 절을 울리고/가을 달은 겹겹 멧부리에 걸렸네’(이현)
‘여관 침상에 턱을 괴니 등불만 깊어/홀로 거문고 잡아 향수를 달래는데/고마워라 스님의 소중한 마음 씀씀이/좋은 시를 자주 보내어 발자국 소리를 대신하네’(이방언)
한태문 부산대 교수(국문과)는 “새벽 종, 가을 달, 향수 같은 서정적인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벳슈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잠을 못 이루는 조선인들을 달래주던 일본인이었다”며 “접반승이라는 공식 업무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통신사 일행을 배려했으며 통신사들 또한 그의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마음에 감동했음이 시에 잘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당시 통신사 서기를 맡았던 홍순연(洪舜衍)이 ‘비단을 머금은 듯 민첩하고 격조는 솟구친 봉우리처럼 높다’며 벳슈의 재능을 칭찬한 글도 있었다. 한 교수는 “이뿐만 아니라 벳슈를 남송시대에 명망을 떨쳤던 중국 최고 승려시인 혜휴(惠休)와 비견하는 시도 있고 자신의 문학적 재능이 벳슈만큼 뛰어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시도 있다”고 전했다.
이런 벳슈와 이별하는 것을 통신사들은 못내 서운해했다. 정사 조태억이 지은 시에는 이런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흰 구름 가득한 넓은 바다가 돌아갈 노정/한 조각 돛단배는 고국을 향한 마음뿐/서글프다 스님과는 이제부터 소식조차 막히리니/불가(佛家)의 맑은 만남 다시 이루기 어려우리.’
○ 일반인이 보기 힘든 유물
매년 교토를 방문하는 한국인은 수십만 명에 달하지만 자조원 유물들을 접하기는 힘들다. 몇 년에 한 번씩 특별 전시 때만 공개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여타 많은 일본 절과 마찬가지로 자조원은 신도들의 기부금으로만 운영되는 터라 기본 경비를 충당하기에도 벅차다.
이런 와중에도 히사야마 스님은 유물이 발견됐던 낡은 나무 창고를 화재와 통풍에 강한 세라믹 소재로 바꿔 짓고 있다. 총 5억 원이 드는 사업이다. 스님은 “앞으로 3억 원 정도가 더 필요한데 주차장 이용료, 입장료 등을 모으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웃어 보였다. 전시관 건립에 한일 양국 정부나 기업의 후원이 필요하냐고 묻자 그는 “지원을 받으면 제약도 커지지 않겠는가”라고 조심스레 답했다.
히사야마 스님은 “2007년 8월 조태억의 11대 후손이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며 “선조의 흔적을 보며 기뻐하는 모습에 나 역시 뿌듯했다”고 했다.
마침 부산시립박물관이 6일까지 열리는 ‘조선통신사와 부산’전에서 자조원 유물을 대거 선보이고 있다. 선조들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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