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에 울려 퍼진 이른 퇴근 인사. 이런 인사를 받아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누가 들어 주길 바라며 외친 게 아니다. 홀로 일과를 끝내며 뿌듯함을 표현한 것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착한 자택은 일터에서 불과 15초 거리. 1년여 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다. 상사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억지로 끌려갔던 술자리도, 일과 시간에 끝내지 못한 업무에 대한 부담도 없다. 집에 와선 식사를 한 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에 나섰다. 그리고 오후 10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홈쇼핑 업체를 그만두고 올해 9월부터 전북 남원시에서 홀로 흑염소 농장을 운영하는 ‘새내기 귀농인’ 최기표 씨(36)의 하루 일과다.
동아일보와 딜로이트컨설팅이 개발한 동아행복지수(동행지수) 응답자의 직업별 행복도에서 농림 및 축산업 종사자의 동행지수가 62.74점으로 모든 업종 중 가장 높았다. 최 씨는 “귀농 생활은 대도시 직장 생활과 달리 ‘나만의 시간’이 많다. 내가 스스로 하루를 계획하고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게 행복”이라고 말했다. ○ “농촌에서는 내가 사장님”
최 씨는 귀농 생활이 도시에서의 직장 생활보다 행복한 이유로 △나만의 시간과 삶의 결정권 획득 △건강·심리적 안정을 꼽았다. 그는 지난해 11월까지 경기 수원시에 거주하면서 군포시에 있는 회사에 다녔다. 업무 실적과 승진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린 그는 고혈압과 탈모가 생기는 등 힘든 일이 많았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귀농한 뒤에는 이런 걱정에서 벗어났다. “귀농 생활에는 인간이 만든 고정된 시간표와 계급이 없다. 오직 염소가 태어나는 시간 등 자연의 시간만 있다. 내가 사장님이기 때문에 눈치 볼 필요 없이 삶의 주체로서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
5일 농장에서 만난 최 씨는 하루 두 차례 염소에게 밥을 주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을 산책하거나 지인을 만나며 보냈다. 그는 “이해관계로 얽힌 인간관계의 불편함도 없어졌다”고 했다. “홈쇼핑 업체를 다닐 때는 하루 최대 80개 업체 관계자와 통화를 주고받았다. 휴대전화에 등록된 관계자만 500명에 달했다. 업무로 얽힌 사람들과는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풍요 속 빈곤’을 느꼈다. 지금은 고향 친구, 부모님 등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폭은 좁아도 행복은 커졌다.”
스트레스가 사라지자 건강도 좋아졌다. 최 씨는 “수면 시간이 충분해서인지 혈압이 낮아졌고 섬진강 주변을 산책하며 명상을 해 정신 건강도 되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농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면서도 “도시 직장인도 ‘나만의 시간 갖기’ 등 귀농의 장점 중 일부를 활용한다면 행복도를 높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하루 일과를 조절할 수 있는 귀농인은 가족과의 시간을 직장인보다 많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들의 행복도가 높은 이유는 ‘가족’을 ‘경제적 안정’보다 중시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동행지수 결과와 일맥상통한다. 경기 용인시에서 버섯 농장을 운영하는 귀농인 홍성욱 씨(36)는 “(직장인보다) 자녀 등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고, 자연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 대도시에서 멀어질수록 행복한 사람들
귀농인은 행복한 환경을 찾아 삶의 터전을 바꾼 사람들이다. 그러나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이사하지 않더라도 대도시를 떠나는 잠깐의 시간을 누리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직장을 다니는 김선형 한국통합저작권보호협회 이사(60)는 주말마다 경기 평택시로 향한다. 50평의 텃밭에 고구마와 감자 등을 재배하며 주중에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했다. “주말에도 도시에 남아 있으면 일과 관련된 생각을 잊기가 쉽지 않다.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고 수확할 때가 되면 성취감도 느낀다. 텃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행복해진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벗어나는 출근자들의 경우 출근 시간이 길어지면 동행지수도 올라가는 것으로 조사됐다. 설문 응답자들은 “긴 출근 시간에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고속철도(KTX) 탑승 시간을 포함해 서울에서 대전까지 1시간 30분 동안 출근길에 오르는 직장인 나영 씨(32·여)는 “열차에서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책을 읽거나 어학 공부를 하면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동행지수 분석에서는 자신의 발전과 취미 생활 등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시간이 긴 사람일수록 행복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 휴양같은 제주생활? 현실은 다르네 ▼
16개 시도중 심리적 안정 1위… 관광지 한철 장사에 물가 비싸 경제적 만족도는 6위에 그쳐
서울에 사는 직장인 박경민 씨(32)는 지난주 ‘국내 최고 휴양지’로 꼽히는 제주도로 출장을 갔다. 업무를 마치고 짬을 내 관광하다 깜짝 놀랐다. 평일 오후 3시경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는 자신과 대비돼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행복의 낙원’처럼 보이는 제주도에 무작정 정착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박 씨의 생각처럼 제주도 사람들은 마냥 행복할까.
동아일보-딜로이트컨설팅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의 동행지수는 전국 4위(59.97점)였다. 풍요로운 자연 환경과 여유로운 생활이 조화를 이룬 도시답게 제주도 주민들은 심리적 안정(1위), 일상생활 만족(2위) 항목에서 높은 만족감을 보였다. 그러나 경제적 만족(6위)과 업무 만족(7위), 건강(9위) 순위는 낮았다.
경북 경주시에 살다 올해 1월 제주도에 정착한 김인영 씨(34·여)는 “서울 등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대부분 관광객을 상대로 숙박업소 등을 운영하지만 이는 휴가철에 집중되기 때문에 수입의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도의 물가가 높은 편이어서 생활비 문제로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제주시청에 따르면 올해 신규 등록된 숙박업소는 340개. 그러나 폐업한 업소도 200개에 달한다. 반면 원주민들의 생활 전반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다. 제주도 토박이인 강수영 제주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소장(40·여)은 “섬이라는 공간 특성상 원주민들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 지인들과 함께 행복을 가꿔 나가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제주도에 사는 대도시 이주민과 원주민 모두 건강 문제에 대한 행복도는 낮았다. 강 소장은 “종합병원이 제주도 도심에 집중돼 있다 보니 외곽 지역 거주자들은 건강 상태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암 등 중병에 걸렸을 때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특별취재팀
※ 특별취재팀
△정치부=김영식 차장 spear@donga.com △산업부=정세진 기자 △정책사회부=유근형 기자 △스포츠부=정윤철 기자 △국제부=전주영 기자 △사회부=박성진 기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