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대 성장에 씨마른 ‘2차 술자리’… 공짜시설에만 노인 북적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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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새 성장판 열어라]<2>저성장 반면교사 ‘日 잃어버린 25년’

일본 경제는 1960년대 10% 내외 고도 성장을 하다 1970년대 5%대, 1980년대 4%대로 떨어졌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메이드 인 저팬’ 제품은 엔화 약세의 도움을 얻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본은 넘치는 달러로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뉴욕의 랜드마크인 록펠러센터 등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성장률이 1%대로 추락한 것. 2000년대 들어선 아예 0%대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한국에 20년 이상 앞서 저성장 늪에 빠져 있는 일본. 그로 인해 일본인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 사라진 “2차 한잔 더”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10시 도쿄(東京) 메구로(目黑) 구 지하철 메구로 역 앞에 있는 한 일본식 주점. 레스토랑 사장, 주점 경영자, 중소기업 사장 등 40여 명이 모여 송년 파티를 하고 있었다. 모임을 주최한 이는 창업 컨설팅 회사를 경영하는 기무라 다카하시(木村高橋·58) 회장. 컨설팅 고객들과의 모임을 끝내며 기무라 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회비는 1만 엔(약 9만7000원)입니다. 옛날 잘나갈 때는 고객 여러분을 무료로 모셨는데 워낙 장기간 경기가 안 좋다 보니….”

일본의 저성장은 최우선적으로 근로자의 월급봉투와 자영업자의 수입에 직격탄을 날렸다. 기무라 회장도 1990년대 후반까지 자비로 송년 파티를 주최했지만 2000년대 들어선 회비를 걷어야만 했다.

일본 국세청에 따르면 민간 기업 근로자의 연평균 급여는 1997년 467만3000엔(약 4500만 원)으로 정점을 찍었고 그 후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2014년에는 415만 엔(약 4000만 원)이었다. 월급봉투가 줄어드니 샐러리맨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일본에선 1차 회식 후 “2차 한잔 더”를 외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무라 회장의 송년 파티 역시 오후 10시에 끝났고 참석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지난달 23일 오전 1시 도쿄 도심인 미나토(港) 구 신바시(新橋) 역 인근 맥도널드 매장. 1층과 2층을 합해 모두 8명의 손님이 있었다.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도 3명이나 보였다. 이들은 예외 없이 200엔(약 1900원)짜리 햄버거 하나를 주문한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심야에 택시를 타고 30분만 달려도 택시비가 10만 원을 훌쩍 넘어가기 때문에 맥도널드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맥도널드 종업원은 “오전 2시면 청소를 하기 위해 잠자는 손님들을 모두 바깥으로 내보낸다. 그럼 다들 신바시 역으로 가서 새우잠을 잔다. 오전 5시쯤 지하철이 다니기 시작하면 다들 사라진다”고 말했다.

○ “결혼 포기했어요”


나카다이라 히로코(中平弘子·가명·42·여) 씨는 파견 사원이다. 도쿄 신주쿠(新宿)에 있는 출판 회사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자료 정리 업무를 한다. 한 달에 받는 월급은 14만 엔(약 136만 원).

매달 1만 엔씩 모아 1년에 한 번은 명품을 산다. 틈틈이 부모님께 용돈도 받는다.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결혼’은 예외였다.

나카다이라 씨는 22일 기자와 만나 “주위 지인들이 예외 없이 비정규직이다. 정규직은 정규직끼리, 비정규직은 비정규직끼리 서로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정규직끼리 결혼해 어떻게 가정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2014년 기준 일본의 정규직 연평균 급여는 477만7000엔(약 4600만 원)이지만 비정규직은 169만7000엔(약 1650만 원)에 불과했다. 임원을 제외한 전체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37.4%다.

일본은 1970년대 인구 1억 명을 돌파했고 국민소득도 가파르게 늘어나 ‘1억 총중류(總中流·일본 전 국민이 중산층에 해당한다는 의미)사회’라는 말이 생겼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다. 일본인 대부분이 잘산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25년간의 저성장으로 인해 일본 중산층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통상 연소득 300만 엔(약 2910만 원) 이하면 중류가 아닌 하류(下流)로 분류된다. 일본 국세청 민간급여통계에 따르면 2002년 34.9%이던 하류 계층은 2014년 40.9%로 늘었다.

○ 수명 100세의 공포

12월 22일 오후 도쿄 미타(三田) 역 인근에 있는 미타도서관. 70여 명의 이용자 대부분은 60세 이상으로 보였다. 도서관을 떠나는 한 70대 노인에게 ‘자주 오느냐’고 물으니 “돈 안 들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거의 매일 온다”는 답이 돌아왔다.

도서관에서 도보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미타스포츠센터. 3층으로 올라가니 흥겨운 음악에 맞춰 40여 명이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다. 어림잡아 절반 정도는 60세 이상이었다. 스포츠센터 직원은 “오전에는 거의 대부분 노인들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65세 이상의 미나토 구 주민이면 무료로 스포츠센터를 이용할 수 있고, 65세 미만은 500엔(약 4900원)만 내면 된다.

‘저축 왕국’ 일본이기에 노인들이 현금 많기로 유명하지만, 요즘 노인들은 공짜 시설을 찾으며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 정년퇴직 후 받는 연금 수령액은 1개월에 19만 엔(약 184만 원) 정도에 불과해 부부가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한데 100세까지 살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미리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복지비 지출을 깎는 일본 정부도 노인들이 지갑을 닫게끔 만들고 있다. 노인들까지 소비를 줄이면서 저성장이 더욱 고착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도쿄=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술자리#구조개혁#저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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