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주소에 대한 퀴즈 하나. 여러분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새 주소를 아시나요? 그렇다면 다섯 자리의 새 우편번호까지 기억하나요? 둘 다 맞혔다면 새 주소에 완벽하게 적응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둘 다 모르고 있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새 주소인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이를 낯설어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는 겁니다. 새 주소가 간편해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여기저기서 원성과 탄성이 들려옵니다. 새 주소에 대한 의견을 다시 들어봤습니다. 》
“비효율의 극치” vs “세련된 이름”
“저희 동네는 예전엔 개울에 가재가 많이 살아서 가재울로 불렸다가 가좌동이 됐죠. 어른들은 가재울이라는 말을 아직도 쓰세요. 가좌동에는 일제 잔재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전 언젠가 가좌동이 다시 가재울이 됐으면 했어요. 가재울을 발음하면 소리 울림도 좋잖아요. 그런데 우리 동네 이름이 갑자기 ‘증가로길’로 됐네요. 증산동과 가좌동을 합쳐 증가로길이 됐다나요. 증가로길에서 가재울의 싱그러움이 느껴지나요? 지명에는 문화가 담겨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땅에 대한 고민 없이 행정 편의로 구획을 나눠 이름을 붙인 것 같아요.” ―대학생 윤모 씨(22)
“새 주소 덕에 단골이 많아졌어요. 우리 가게는 대구 중구 동인동에 있어서 처음엔 이름을 ‘동인동 꿀다방’으로 하려 했죠. 그런데 구청에서 영업 허가를 받으려고 새 주소를 찾아보니 ‘국채보상로 735’라는 걸 알게 됐죠. 국채보상로는 대구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지명이죠. 건물번호인 735라는 숫자도 근대적이면서 세련된 느낌이었어요. 과감하게 카페 이름을 ‘cafe 735’로 정했더니 단골이 많아졌어요. 저는 명함과 지도에도 새 주소만 씁니다. 손님들은 카페 이름이 독특하고 기억하기도 쉬워서 자주 찾게 된대요.”―자영업자 백경진 씨(57)
“현대인이 외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우리 집 새 주소까지 외워야 한다니 골치가 아프네요. 인터넷 포털에 우리 집의 새 주소를 검색하면 울컥울컥해요. 어떤 기준으로 새 주소를 만든 건지 도통 모르겠어요. 과거에는 ‘천국동 128-4’ 하면 끝이던 주소가 이제는 ‘하늘대로 12길 128’이 됐어요. 둘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죠? 또 ‘길’과 ‘대로’는 영어로 어떻게 써야 하나요? 길은 gil인가요, ghil인가요? 저 혼자만 이러는 게 아니라 다수가 동일하게 실수하고 반복하는 걸 보면 엄청난 비효율입니다.”-직장인 정모 씨(43)
“못 찾겠다” vs “해외 직구엔 편해”
“저희는 주소만 보고 단박에 어딘지 찾아가는 베테랑이죠. 이런 우리들이 요새는 초짜가 된 기분이네요. 예컨대 양재대로는 서울 강동·송파·강남·서초구를 지나 경기도 과천에까지 이어진 어마어마한 곳을 아우르는 곳이 됐죠. 이러다 보니 ‘양재대로 ○○○-○’이란 주소만으로 무슨 구, 무슨 동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요. 게다가 ‘12길’이 있고 ‘12가길’ ‘12나길’까지 있고…. 법정동과 행정동의 구분이 무색한 경우도 적지 않죠. 그런데 집배원들의 배달구역은 옛 주소를 기준으로 정해져 있어요. 번거로워도 새 주소를 다시 옛 주소로 변환해서 일하고 있어요.”―우체국 집배원 강모 씨(32)
“외국 주소들은 대체로 ‘베이커 가 221B(221B Baker Street)’처럼 짧은 편이에요. 그런데 국내에서는 ‘OO마을14단지 ××파크 ○○아파트 ×××호’처럼 예전 아파트 주소를 영문으로 쓰면 길이가 늘어나서 정해진 칸 안에 다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전화번호나 e메일이 적혀 있지 않으면 반송되기 십상이죠.”―DHL 배송기사 최모 씨(40)
“저는 해외 온라인 사이트에서 직접구매(직구)를 많이 해요. 기념일을 앞두고 미국의 유명 속옷 브랜드에서 직구를 했죠. 기념일이 코앞이라 특송비를 더 주고 속옷을 항공편으로 받기로 했죠. 그런데 열흘이 지나도 안 왔어요. 확인해 보니 집주소를 영어로 입력했더니 이름이 길어져서 동·호수가 잘렸더라고요. 여러 곳에 전화를 돌리고 한참을 수소문해서 반송 직전에 찾았네요. 결국 정작 기념일엔 다른 속옷을 입어야 했답니다. 그 뒤로는 해외 직구할 때에는 무조건 길이가 훨씬 짧은 새 주소로 입력해요.”―직장인 이모 씨(27)
“한국으로 출장 갔을 때였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택시기사에게 ‘서울시 강남구 영동대로 ○○○’(새 주소)으로 가 달라고 했는데, 기사는 새 주소는 모르겠다며 호텔 이름만 자꾸 물었어요. 하지만 호텔이 신축 호텔이라 기사도 모르는 곳이었고 결국 호텔로 전화했어요. 그런데 호텔에서 다시 알려준 주소는 ‘청담동 ○○○번지’(기존 주소)였어요. 일본으로 돌아가서 동료들에게는 ‘한국에 출장 갈 땐 미리 두 개의 주소를 준비해 가라’고 신신당부했지요.”―다카하시 히로스케 씨(36)
“시즌에 따라 해외에서 상품을 제작합니다. 시차 때문에 자다 깨서 물건을 받을 주소를 갑자기 영어로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는 일이죠. 요즘에는 주소 체계가 바뀌어서 거래처에 시, 구, 도로명 정도만 말하면 돼서 훨씬 편해요.”―쇼핑몰 운영자 정지현 씨(36)
“새 주소를 보면 대뜸 ‘여기는 어디쯤이겠네’라고 생각하기 힘들어요. 34년이나 서울에서 택시 운전을 했어도 소용없네요. 사람들이 주소를 기억하는 방식도 아직은 ‘무슨 동 몇 번지’예요. 다짜고짜 ‘무슨 대로의 몇으로 가주세요’라고 하지 않거든요. 저도 새 주소로는 길을 못 찾으니 차량 내비게이션의 업데이트를 자주 하는 수밖에요.”-택시 운전사 정남일 씨(61)
“추가 비용 발생” vs “주소 전환은 쉬워”
“개인은 포털 등의 ‘도로명 주소 변환’ 서비스를 이용하면 기존 주소를 새 주소로 쉽게 알 수 있어요. 동 이름이나 빌딩 이름만 입력하면 도로명 주소나 영문 주소를 알 수 있어요. 문제는 고객 주소를 대량으로 다뤄야 하는 저희 같은 중소기업들이죠. 대기업이야 여력이 있어서 비교적 대처를 잘하겠지만, 전산작업에 비용을 많이 투자할 수 없는 중소기업들은 새 주소에 적응하는 데 또 다른 비용이 들어요.”―중소기업 사장 김모 씨(62)
“개발자가 일일이 주소 데이터베이스를 내려받을 필요가 없도록 도로명 주소 변환에 필수적인 부분을 애플리케이션 임대 서비스(ASP) 형태로 제공하기로 했어요. 크게 수익이 나는 사업은 아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하니 뿌듯해요.”―정보기술업체 경영기획실장 이한슬 씨(32)
“외국 기업들은 거래 기업이 견실한지 보기 위해 주소를 활용하기도 해요. 실제 주소와 서류상 주소가 같은지 보는 거죠. 두 개가 일치하지 않으면 대금 결제를 거부하기도 해요. 기업들은 무역 보험증권, 통관인증 등 영문 주소와 연계된 각종 인허가 서류들의 기존 체계를 전부 변경하느라 골치가 아프죠. 보통 특허 관련 주소를 변경하는 데 건당 400달러가 들어요.”―무역회사 사장 정모 씨(53)
“일일이 기업의 기존 주소 체계를 바꾸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힘들지요. 국가가 영문으로 ‘주소 동일성 증명서’를 발행해 주니 이를 해외 거래처에 보내는 방법을 써 보세요. 발급 비용은 무료입니다.”―행정자치부 주소정책과 관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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