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2년간 산 적이 있다. 그때 생긴 이상한 버릇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우면 일본어로 혼잣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누가 일본어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답하는 중인 양 벽을 보고 한참을 중얼중얼하면 차분해졌고, 문제의 핵심에 다가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어로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일단 그렇게 하기 민망하다. 이런저런 머쓱한 단어를 꺼낼 수가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이 러브 유(I Love You)에 비해 얼마나 무겁게 느껴지는가. 게다가 나의 한국어 화자는 빠져나가기 달인이다. 아니, 그냥, 뭐, 저기, 글쎄, 이런 단어로 연막을 치면 간단하다. 부모 앞에서 ‘아, 몰라’라는 말만 반복하는 자식 같다. 한국어와 나는 너무 가깝다.
일본어 세계의 나는 그렇지 않다. 훨씬 조심스럽고 말 자체도 느리다. 쓸 수 있는 단어가 한정적이라 오히려 직접적인 표현을 고를 수밖에 없다. 단어 사이의 침묵이 어색하지 않아 도망갈 수도 없다. 어떻게든 지금의 갑갑함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단순한 진실에 닿곤 했다.
인도인 부모를 가진 미국인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에 매료되어 1년간 로마에 살면서 이탈리아어를 배운다. 더 나아가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처음 이 책을 살 때는 낭만적인 책인 줄 알았다. 한 언어의 달인이 다른 언어를 배우는 기쁨을 보여주고, 외국 생활에 대한 즐거움도 곁들여 보여주는 그런 가벼운 산문.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가 이탈리아어로 원문을 썼기에 자동으로 소박해진 이 산문은, 높은 외국어의 벽, 혼란스러운 언어의 세계에서 어떻게 버텼는지를 치열하게 적어둔 기록이었다.
우리는 모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게 되면서 세상도 능숙하게 살아내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 착각은 모국어의 틀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부서진다. 햄버거 하나도 똑바로 시키지 못한 나, 흔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계속 그 안에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한계를 느끼기 위해, 절망하기 위해 일부러 나가야 하는가.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로 모국어인 영어에 통달한 작가가 일부러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 이유는 책의 이 부분에 가장 명확하게 나와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한 순간순간들은 살아남거나 사라진다. 변화가 우리의 존재에 뼈대를 만든다.’ 나는 아마도 일본어로 더듬더듬 혼잣말하는 버릇을 버리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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