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행복원정대/초등 고학년의 행복 찾는 길]<1> 우리 마음 어른들은 너무 몰라요…중2병보다 무섭다는 ‘초5병’
서울 마포구에 사는 주부 김모 씨(43)는 요즘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을 몰래 관찰하는 게 주요 일과다. 올해 들어 부쩍 말투가 무뚝뚝해지더니 뜬금없이 “나 예쁘게 생겼어?” “나 뚱뚱해?”라고 묻곤 한다. 양치질하고 자라는 말에도 “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그래?”라고 갑자기 화를 내며 방문을 꽝 닫고 들어간다. 뭐 하나 슬며시 문을 열어 보면 거울 앞에 서 있다!
“예전에는 시키는 대로 잘 따라왔는데 요즘엔 도무지 아이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아직 초등학생인데 내 아이가 맞나 싶어요. 미운 5학년이라더니….”
요즘 학부모와 초등학교 교사들 사이에서는 “‘초5병’이 ‘중2병’보다 무섭다”는 말이 나온다. 처음엔 “쪼그만 게 대든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초기 진압에 실패하면 중2병까지 이어지는 ‘대참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초등 4∼6학년과 어머니 128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에서도 5학년 학생들에게서 이상 기류가 감지됐다. 주관적인 행복도가 5점 만점에 4.14점으로 4학년(4.38점)이나 6학년(4.43점)에 비해 낮았다.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행복해질 것이다’는 문항에 대해서도 5학년(3.93점)은 4학년(4.21점)과 6학년(4.30점)보다 점수가 낮아 미래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관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 집에서도 “미운 5학년”
회사원 장모 씨(41)는 최근 주말 수영반에 다녀온 5학년 아들의 질문에 당황했다. 아들이 “샤워하면서 봤는데 내 고추가 친구 것보다 작은 것 같다”며 그 이유를 물었기 때문이다. 장 씨는 “초등학교 5학년이 성적인 신체 변화에 대해 또래와 비교하면서 신경을 쓴다는 게 놀라웠다”고 했다.
5학년 성모 양(11)은 요즘 부쩍 “남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같은 반 친구들이 생리를 시작하는 걸 보고 잔뜩 겁을 먹은 것이다. 어머니 김은희 씨(40)는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시기라 몸의 변화가 아이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초등 5년생들의 상대적 불행감은 급격한 신체적 변화로 인한 혼란과 불안, 스트레스 때문인 경우가 많다. 여학생은 초경에 대한 두려움을, 남학생은 신체 변화에 민감해지며 성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내면도 혼란스럽다. 올해 설날 주부 이신정 씨(36)는 난데없이 혼자 지하철을 타고 외갓집에 가겠다는 5학년 아들을 달래다 크게 화를 냈다. 4가족이 함께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게 연례 행사였다. “요즘 부쩍 독립적인 행동을 해요. ‘아, 이제 내 품 안의 자식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주장은 강해졌지만 뭐가 힘든지, 고민은 뭔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죠. 내 아들이지만 정말 낯설어요.”
5학년들의 ‘가족’에 대한 만족도는 떨어지는 것으로 나왔다. ‘나는 우리 집이 좋다’라는 문항에 5학년은 4.52점을 주어 4학년(4.86점)이나 6학년(4.77점)보다 낮았다. 부모에 대한 만족도도 4, 6학년보다 낮았으며, ‘나는 좋은 자녀다’라는 문항에도 3.90점을 주어 4, 6학년(각각 4.43점, 4.18점)보다 스스로를 낮게 평가했다.
○ 교사들도 “5학년 담임 맡기 싫다”
집에서만 ‘미운 5학년’이 아니다. 초등학교 교사들도 5학년 담임 맡기를 꺼린다. 서울 대치초등학교 전상훈 교사는 “5학년이 되면 반항적이 된다. ‘글을 읽어보라’고 시키면 ‘이건 안 해도 될 것 같다. 하기 싫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서울 강북의 초등학교 정모 교사는 “5학년이 다루기가 가장 어렵다. 6학년은 머리는 더 굵지만 ‘내가 최고학년’이라는 마음으로 의젓하게 행동하려 하는데 5학년은 미숙하고 자기주장이 강해 통제가 어렵다”고 말했다. 심층 인터뷰에서 ‘나는 학교생활이 좋다’는 문항에 5학년은 3.98점을 주어 4학년(4.19점)과 6학년(4.43점)보다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입시에 대한 부담도 한몫을 한다. 5학년이 되면 성적에 따라 일반고와 특목고로 갈 아이들이 나뉘고, 최상위권 대학 진학의 가능성도 구체화된다. 김진형 군(11)은 “쉬는 시간에도 짬짬이 학원 숙제를 해야 해 많이 지친다”고 했다. “선생님과 엄마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편하게 산다’고 하신다. 서울대 가겠다는 아이들은 자기가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시켜서 말하는 거다.” 정선미 안산성포중 상담교사는 “중2병의 원인은 초등 5학년 때 부모의 양육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든다면 아이는 부모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탈선하기 쉽다”고 조언했다.
홍현주 한림대 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초등 5학년은 자기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시기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인정받길 원하기 때문에 부모들이 낯설어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때는 부모, 자녀와의 관계에서 분수령이 되는 시기이자 아직은 부모가 아이를 다독여줄 수 있는 때이므로 자녀와의 신뢰 관계를 형성해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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