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수완 삼성물산 리조트사업부 동물원장(56)을 최근 만나고 나서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미래의 동물원은 어떤 형태로 남을 것인가’란 질문들이 뇌리에 내내 머물고 있다. 지난달 29일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 판다월드. 수컷 판다 ‘러바오’(樂寶·‘즐거움을 주는 보물’이라는 뜻)는 봄 햇살이 내리쬐는 야외에서 대나무를 먹고 있었다. 기다란 대나무 줄기를 손과 이로 뚝 끊은 뒤 입안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가며 씹었다. 무성한 대나무 잎도 샐러드 먹듯 삼켰다. 판다가 노는 2단 높이의 나무 평상은 키즈 카페의 놀이시설과 흡사했다. “러바오”라고 목청껏 불러보았다. 미리 다녀간 후배가 “귀여운 판다를 보니 힐링이 되더라”고 말한 게 생각났다. 그곳에서 권 원장을 만났다. 》
“동물사육의 최고 정점은 판다” ―판다가 대나무 줄기도 먹는 게 신기하다.
“대나무의 뿌리 빼고는 다 먹는다. 경남 하동에서 냉장차로 운송해 오는 대나무를 매일 15kg 정도 먹는다. 하루 24시간 중 먹는 시간이 14시간쯤이고 나머지 시간은 잔다. 먹는 양의 90%는 대나무이지만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쌀, 콩, 밀가루로 만든 빵도 먹인다.”
중국의 국보급 동물 판다가 한국에 온 건 이번이 두 번째다. 한중 수교(1992년)를 기념해 1994년 판다 한 쌍(밍밍, 리리)이 왔다가 1999년 돌아갔다. 외환위기 후 매년 100만 달러(약 11억 원)의 판다보호기금을 중국에 내는 게 과도하다는 여론 때문이었다. 용인 자연농원(에버랜드의 전신) 동물개발팀 과장이었던 권 원장은 당시 판다 관련 실무를 맡았다.
―밍밍, 리리와 정이 많이 들었겠다.
“난 정서적 교감이 있었는데 걔들(판다들)은 모르겠다(웃음).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자연농원이 세계적 동물원이 되려면 판다를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꿈을 가졌다. ‘동물 하는 사람’ 입장에서 동물 사육의 최고 정점은 판다라고 생각한다. 희귀해서 아무나 못 해보지 않나. 당시 한중 수교로 꿈이 이뤄졌다.”
중국이 자국에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나라에 판다를 선물하는 이른바 ‘판다 외교’는 1941년 국민당 장제스(蔣介石)가 중일전쟁 때 중국을 지원한 미국에 감사의 표시로 판다 한 쌍을 보내면서 시작됐다. 1983년 워싱턴조약 발효로 희귀동물을 다른 나라에 팔거나 기증할 수 없게 되자 중국은 돈을 받고 장기 임대하는 형식으로 판다 외교를 이어가고 있다.
―멸종위기종인 판다는 중국에 몇 마리나 사나.
“2014년 중국 정부는 1864마리의 판다가 중국 자연에서 살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밖에 사람이 사육하는 게 425마리, 외국에 나가 있는 게 52마리. 이번에 한국에 올 수 있는 40∼50마리의 후보를 서류로 받은 후 쓰촨(四川) 성 판다 기지에 가서 최종적으로 데려온 게 러바오와 아이바오(愛寶·‘사랑스러운 보물’이란 이름의 암컷 판다)다.”
판다는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 1972년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일본 도쿄 우에노 동물원에 기증했던 판다 ‘란란’이 1979년 심장병으로 죽었을 때엔 수만 명의 조문객이 검은 띠를 팔에 두르고 눈물을 흘리며 동물원을 찾았다.
―왜 사람들이 판다를 좋아할까.
“구르기도 하고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는 등 행동이 귀엽다. 뒤뚱거리는 판다의 걸음새는 아기가 처음 일어나 걸을 때의 모습과 닮았다. 작은 눈이 커 보이는 건 눈 부위의 검은 털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옛날 한복 같은 판다의 흑백 색상에도 매력을 느꼈다.”
1994년 11월 중국 리펑(李鵬) 총리가 방한해 자연농원 판다월드(올해 연 에버랜드 판다월드의 전신) 개관식에 참석했다.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판다월드(330m²·약 100평)를 방문해 딱 한마디 했다고 한다. “왜 이렇게 작게 지었나.” 에버랜드는 이번에 7000m²(약 2100평) 부지에 200억 원을 들여 최첨단 정보기술(IT)이 융합된 판다월드를 만들었다.
“사육사가 실수하지 않도록”
경북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권 원장은 1987년 중앙개발(자연농원의 모회사)에 입사해 2003년부터 동물원장을 맡고 있다.
―동물을 좋아했나 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축산학과를 다니는 형의 권유로 별 생각 없이 수의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가보니 의외로 재미있었다. 동물의 한 곳이 아프면 다음에는 어디가 아파질 수 있다는 논리가 수학 같았다. 동물의 배설물 냄새도 싫지 않았다.”
그는 수의학과 출신을 뽑는 제일제당에 가겠거니 생각하며 삼성그룹 공채에 원서를 냈다. 그런데 중앙개발로 발령을 내더니 자연농원 동물부에 배치됐다. ―그때부터 동물 진료를 했나.
“수의사들은 입사하면 한 달 동안 사육사들과 함께 실습받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동물원장이 무슨 이유인지 그 실습을 6개월이나 시켰다. ‘본업이 아닌 나에게 왜 시키나, 계속 회사를 다녀야 하나’ 싶었는데 그 실습을 통해 동물과 사육사의 패턴을 잘 알게 됐다. 그래서 나도 지금 수의사들에게 6개월 실습을 시킨다. 1994년 중국에서 판다가 올 때부터 동물개발과 기획 일을 하게 됐다.”
에버랜드 직원들은 권 원장에 대해 “사육사들에게 엄한 상남자(진짜 남자)”라고 말했다. 과연 그런지 물었다.
“동물원에서는 동물이 죽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직원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역할이다. 실수해서 나쁜 일이 발생하면 그걸로 끝인 거다. 원리원칙을 따르지 않는 일이 반복되는 직원이 있다면 자리를 바꾼다.”
―칭찬에 인색할 것 같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제목의 책이 있지만 나는 ‘칭찬으로 고래가 춤추다 망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다. 내 역할은 잘못된 점을 찾아내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다. 그러니 칭찬할 일이 많겠나.”
―동물은 칭찬하면 어떤가.
“효과가 있다. 인상 쓰며 말할 때와 부드럽게 말할 때 동물의 반응이 다르다. 가령 사육사가 ‘야, (실내로) 들어가’라고 크게 소리 지르면 동물이 움찔한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대하는 태도와 시선, 말소리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되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동물을 치료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개가 전염병에 걸려 한 달간 같은 방에서 먹고 자면서 치료한 적이 있다. 살릴 수 있는 병이 아니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이렇게 동물이 고생하는데 끝까지 살리려고 노력하는 게 맞는가, 동물도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지 않나 하고. 그런데 그 개가 살았다. ‘너하고 나하고 재수가 좋다’고 개에게 말했다.”
―정성이 통했나 보다.
“제일 싫은 말이 ‘정성’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정성이 부족하면 동물이 죽는다’고 한다. 죽으면 정성이 부족하고 살면 정성이 안 부족하다는 말인가. 사육사들은 끝까지 동물을 포기하지 않는다.”
“동물 접하면 배려하는 마음 생겨”
에버랜드는 2013년 ‘로스트 밸리’라는 생태형 사파리를 열었다. 수륙양용차로 이동하면서 사자, 코끼리, 기린, 치타, 얼룩말 등 인기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창이 없는 버스나 지붕 뚫린 지프에 탄 관람객들은 동물들에게 직접 먹이를 줄 수 있다.
―지프 위로 기린이 긴 목을 내밀었을 때엔 신기하면서도 솔직히 무서웠다.
“동물원의 존재 이유 중 하나가 동물 보호, 크게 보면 지구 보호다. 동물과 인간이 서로 교감하는 지구가 되도록 동물원의 형태도 바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미래의 동물원은 야생에 가까운 체험과 가상현실(VR)이 서로 보완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동물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VR에서 펼쳐지는 동물 체험과 익숙해지면 동물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지 않을까.”
이번에 문을 연 판다월드는 첨단 IT 장비의 향연장이다. 방사장의 콘셉트는 ‘판다의 숲’. 실내 방사장은 유리벽을 없애고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도록 했다. 판다에게 해로운 적외선, 자외선은 차단하고 가시광선만 투과하는 자연 채광을 구현했다. 실외에는 대나무와 천연잔디를 심어 판다가 쓰촨 성 고향에 있는 느낌을 갖도록 했다. 동물 복지 개념에 따르면 동물원에 사는 동물은 배고픔, 불편함, 질병, 공포로부터의 자유, 정상적 행동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문득 에버랜드의 말하는 코끼리인 ‘코식이’의 안부가 궁금했다. 올해로 26세가 된 코식이는 10년 전 ‘좋아’ ‘안돼’ ‘앉아’ 등 일곱 단어를 말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2012년에는 세계 저명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관련 논문이 등재되기도 했다.
―코식이가 추가로 말하는 단어는 없는가. ‘사랑해’란 말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면 어떨까.
“동물은 인간의 욕심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 당시 사육사는 어린 코식이가 외로울까 봐 여섯 달 동안 같이 자며 돌봤다. 코식이는 사육사를 아빠처럼 따르면서 말을 터득한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사랑해’란 말을 가르쳐 보려 했는데 의도적인 교육은 안 되더라. 동물에게 녹음을 틀어줘서 말을 가르칠 수 있다면 이미 많은 동물이 사람의 말을 했을 거다. 요즘엔 코식이가 너무 커져 발정기에 위험할 수 있어 사육사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다.”
에버랜드 동물원에서 동물들과 29년을 지내온 그에게 우문(愚問)을 던져봤다.
―동물이 인간을 한심하게 여긴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
“많다. 하지만 예를 들지는 않겠다. ‘동물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말은 누구라도 듣기 싫어할 테니.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동물은 사람과 달리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린이는 동물과 교감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지적장애를 지닌 아이가 거의 매일 동물원에 와서 동물과 시선을 맞추며 그림을 그리더니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또 어린이 대상 동물체험 프로그램인 ‘동물사랑단’은 인터넷 접수 10분 이내에 마감이 될 정도로 인기다. 단체생활에 적응을 못했던 한 아이는 동물을 접하면서 남을 배려하는 아이로 바뀌었다. 동물원은 우리 안의 친절과 배려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동물은 무한정으로 베풀어야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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