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아파트 주민이 이런 바둑 내기를 제안해 왔다고 해보자. “내가 지면 10만 원을 낼 테니 당신(홍길동이라 치자)이 지면 5만 원을 내시오. 그 돈으로 불우이웃을 도웁시다. 나는 이겨도 5만 원을 내겠소.” 어쨌든 둘이 10만 원을 맞춰 불우이웃을 돕자는 얘기다. 내기에서 돈을 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제안을 상대한테서 직접 들은 게 아니다. 어느 날 아파트 현관 앞을 지나다 이런 난데없는 제안이 게시판에 붙은 걸 보게 됐다. 당신이 홍길동이면 어떨 것 같은가? 웬만한 사람이면 험한 말이 튀어나오고, 수양(修養)이 웬만큼 됐더라도 “별 이상한 인간 다 보겠네…” 하는 정도의 반응은 하지 않을까 싶다.
프로축구 시민구단 성남FC 구단주 이재명 성남시장이 FC서울에 제안을 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이번 주말(5월 14일) 경기에서 성남FC가 지면 장기 연체 채무자의 빚 10억 원어치를 매입해 탕감하겠다. FC서울이 지면 채무자들의 빚 5억 원을 책임져 달라. 성남FC는 이겨도 5억 원의 빚을 책임지겠다.” 이 시장은 이런 내용의 글을 ‘한판 뜹시다. FC서울에 10억 대전 제안’이란 제목을 달아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럴 리 없지만 패배가 두려워 10억 원 대전을 사양한다면 장기연체 채권 5억 원 매입금 500만 원은 (성남으로) 응원을 오는 FC서울 팬의 입장료로 조달하겠다. FC서울 응원단이 500명은 되겠지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10년 이상 장기 연체돼 회수가 힘든 채권은 시중에서 원금의 1% 정도에 살 수 있다. 그래서 말은 ‘10억 원 대전’이지만 실제 10억 원어치의 연체 채권 매입에는 1000만 원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까 이 시장 말은 성남FC가 지면 1000만 원을 다 낼 테니, FC서울이 패하면 500만 원씩 나눠 내자는 얘기다.
FC서울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 시장은 이틀 뒤 또 글을 올렸다. 이번엔 “FC서울이 패하면 장기 연체 채권을 매입해 줄 기업이나 개인 단체를 찾아 달라. 성남FC가 골을 넣을 때마다 얼마씩 후원해도 좋다”는 다소 황당한 요구를 하면서 전향적인 자세를 가져 달라고 한다. 상대 팀이 골을 넣을 때(우리 팀이 실점할 때)마다 후원할 사람을 찾아달라니…. 이쯤 되면 횡포다. 빚더미에서 헤어날 길 없는 채무자를 구제해 새 출발을 돕는 건 누가 봐도 좋은 일이다. 시민 모금으로 장기 연체 채권을 사들여 채무자의 빚을 감면해 주는 비영리 시민단체(주빌리은행)도 있다. 이 시장은 이 은행의 공동은행장을 맡아 좋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장은 페이스북에 다짜고짜 글부터 올려 5억 원의 채무를 책임져 줄 것을 제안했다. FC서울 쪽엔 일언반구 설명이 없었다. 말이 좋아 제안이지 FC서울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럴 리 없지만… 사양한다면…” 하는 대목에서는 ‘좋은 일에 쓰겠다는데 거부하지는 않겠지?’ 하는 식의 얄팍한 계산도 엿보인다.
기업 구단 FC서울은 저소득 가정 어린이 안과 수술비 지원 등 그간 구단과 선수 개인 차원에서 사회 기여를 많이 해 왔다. 전북현대 최강희 감독은 며칠 전 초등학교 운동장에 인조잔디를 깔아줬다. 울산현대는 일일호프 수익금으로 소아암 어린이를 도왔다. 재능기부를 하는 팀도 많다. 누군가를 돕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이 시장이 은행장으로 있는 주빌리은행 같은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이 시장은 선출직 공직자다. 좋은 이미지를 쌓고 인지도를 높이는 데 자신이 구단주로 있는 팀을 어떻게든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10억 원 대전 상대로 FC서울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FC서울은 리그 1위로 제일 잘나가는 팀이다. 이 시장도 이번 일에 정치적 계산이 깔렸다고 대놓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축구를 정치에) 이용한다기보다는 활용하는 것이고 모든 행동은 정치적 의도가 개재(끼어듦)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말장난이고 궤변이다. ‘활용’이 바로 ‘충분히 잘 이용한다’는 뜻이다. 뜨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구단주가 작정하고 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데 말리기도 어렵다. 그렇더라도, 뜨고 싶으면 혼자 뜨시라. 막무가내로 “한판 뜹시다”면서 애먼 팀에 폐 끼치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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