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성의 오늘과 내일]‘한국의 벡텔’ 구호만 외칠 건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17일 03시 00분


황재성 경제부장
황재성 경제부장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 서방이 갖는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입니다.”

2010년 12월 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한국전력과 미국 벡텔사가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발전소 관련 계약을 맺자 국내 건설업계에선 볼멘소리가 쏟아졌다. UAE 원전은 총공사비가 186억 달러(약 21조7600억 원)에 달하는 초대형 사업으로 2009년 말 수주 때만 해도 국내 해외건설사에 남을 쾌거로 여겨졌다. 하지만 벡텔이 2020년까지 종합설계를 맡고 자문에 응하는 대가로 사업 수익금 46억5000만 달러의 절반이 넘는 27억9000만 달러를 챙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불만이 터진 것이다.

자타 공인 세계 1위 건설업체인 벡텔은 오랫동안 국내 건설업계에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1954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내에 진출한 뒤 당인리발전소, 울진 원전 3·4호기, 경부고속철도, 인천국제공항철도 등에 관여하며 국내 건설사들의 시어머니 노릇을 했다. 특히 건설 초기 부실공사 논란으로 사업 진행이 지지부진했던 경부고속철도에선 공사 관리를 맡아 깐깐하게 굴자 현장 근로자들이 벡텔 관계자들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한국의 벡텔을 만들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달 강호인 장관이 관계 국·실장과 실무자들을 대동하고 전문가들과 정책토론을 벌였고, 필요한 법령 개정도 추진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밝혔다. 현재 한국 건설업이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국내 건설시장은 더 이상 양적 확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간접자본(SOC) 확충과 도시화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1991년 국내총생산(GDP)의 23%에 달하던 건설 투자는 14% 수준으로 떨어졌다. 해외건설도 누적 수주액 7000억 달러 달성과 같은 성과를 냈지만 수익성 등 부가가치는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진다. 게다가 저유가와 세계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중동 등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텃밭은 급격히 축소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벡텔을 만드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진행해야 할 건설산업 구조조정이 너무 더디다. 동아일보가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의뢰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4년까지 진행된 건설업계의 구조조정 실적을 분석한 결과 기초체력이 오히려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 및 당기순이익률, 자산 대비 부채 비율 및 차입금 의존도, 이자보상비율 등 5개 주요 재무지표 중 부채 비율만 약간 개선됐을 뿐 나머지는 모두 나빠졌다. 정부는 “건설경기 침체와 과도한 가격 경쟁으로 인한 저가 수주가 원인”이라고 설명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의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건설업이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내년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도 건설업 구조조정에는 악재다. 선심성 대규모 개발 공약이 남발되면 부실 건설사들이 버티기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입만 열면 ‘한국의 벡텔이 되겠다’는 건설사들의 각성도 필요하다. 1900년대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벡텔은 철도 관련 공사의 하도급업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대 변화에 따라 공사 현장에 신기술을 과감히 도입하는 등 효율적으로 대응했다. 여기에 강력하고 철저한 ‘반부패 윤리 시스템’을 운영함으로써 발주처의 신뢰를 쌓아 성공신화를 일궜다. 부동산과 건설 경기의 부침에 일희일비하는 천수답 경영과 잊을 만하면 터뜨리는 공공공사 입찰 비리 등을 버리지 못한다면 한국의 벡텔은 영원히 허망한 구호로 남을 뿐이다.

황재성 경제부장 jsonhng@donga.com
#한국전력#미국 벡텔#uae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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