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톡톡]세월 쌓인 책갈피, 기억과 대화를 되살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3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 헌책방엔 많은 사람의 사연과 추억이 어려 있습니다. 책읽기 문화의 침체로 동네에서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헌책방을 찾는 발길은 아직 끊이지 않고 있죠. 헌책방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사라져가는 헌책방

“1980, 90년대 전성기 땐 청계천 헌책방이 120군데는 됐었죠. 2000년도부터 점차 줄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21군데뿐입니다. 대형 서점, 중고 서점이 생겨나니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요. 남아 있는 헌책방들은 가겟세도 못 낼 정도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세를 내놓은 지 오래됐는데도 경기가 안 좋아 팔리지 않는 집들도 많고요.” ―현만수 씨(69·평화시장 서점연합회장)

“운영한 지 60년이 넘었지만 3년 전부터 헌책방은 중단하고 내부를 카페로 개조했어요. 서촌이 유명해지면서 방문객은 많아졌지만 장사는 안 돼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진촬영 및 공연 장소로 제공하고 있어요.” ―조희진 씨(56·대오서점 관계자)

“인천 배다리에서 올해로 43년째 운영하고 있어요. 한때 이 일대엔 헌책방이 40여 군데가 있었죠. 그러다 1974년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전철이 개통되면서 손님이 점점 줄었고 지금은 저희까지 포함해 5곳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요. 책방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지식의 통로예요. 지키고 있다는 데 의의를 둡니다. 지금은 서점 옆 건물에 문화공간을 만들어 매달 시낭송회를 열고 각종 전시도 열고 있어요.” ―곽현숙 씨(67·아벨서점 대표)

“대형 온라인 서점에선 새 책과 다름없는 책을 30∼40% 싸게 팔죠. 신간을 싸게 사들여 약간의 마진을 붙여 되파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들었어요. 소비자 입장에선 더 싼 중고 서적에 끌릴 수밖에요. 그러면 중고 서점이 새 책의 할인 매장처럼 되는 거죠. 출판 시장이 잔뜩 불황인데 이런 움직임은 출판 생태계를 위협할 수 있어요. 도서 할인 판매율을 10%로 묶은 도서정가제를 교란할 수도 있고요.” ―오모 씨(43·출판사 대표)

헌책방 살리기 운동

“지난해 6월부터 헌책방 주인들이 추천하는 책 세 권을 무작위로 골라 상자에 담아 판매하는 ‘설레어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한 달에 100여 권 팔려요. 청계천 헌책방 4곳이 참여 중이고 올여름 두 곳을 추가할 예정입니다.” ―김수경 씨(24·연세대 영어영문학과)

“부산시가 헌책방 거리에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을 개관해 카페, 쉼터 같은 공간이 생겼어요. 헌책방들 자체적으로도 인터넷 홈페이지로 전화 주문을 받는 등 변화에 발맞추고 있답니다.” ―양수성 씨(43·부산보수동책방골목연합회장)

“청계천 오간수교 아래 산책로에서 ‘헌책다방 행사’를 2년째 진행하고 있어요. 헌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이벤트죠. 서울광장에서도 매년 ‘한 평 시민 책시장’ 행사를 주기적으로 열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학계 및 현장 관계자 10여 명으로 이루어진 ‘서점활성화 자문위원회’에서도 헌책방을 살리기 위한 여러 대책을 강구하고 있죠.” ―김홍기 씨(59·서울도서관 행정지원과장)

이런 손님들, 기억에 남아요

“딸과 함께 책방을 찾은 한 손님이 자기 동생 이름이 쓰인 백설공주 동화책을 발견한 적이 있어요. 알고 보니 25년 전 그 손님의 남동생이 학교에서 책 한 권 가져오라고 했을 때 이름을 써서 가져갔던 책이었던 거죠. ‘동생과 함께 꼭 다시 찾아오겠다’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나요.” ―조희진 씨(56·대오서점 관계자)

“부산의 한 손님이 1960년대에 출판된 한 절판본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몇 개월 걸려 겨우 찾아내 ‘입금해 주시면 우편으로 보내 드리겠다’고 연락했죠. 그랬더니 그 손님은 ‘내게 첫사랑 같은 책인데 어떻게 우편으로 받을 수 있느냐’며 책값보다 비싼 KTX 티켓을 끊어 직접 서울까지 오셨답니다.” ―윤성근 씨(41·‘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

“주말에 관광객들이 많이 들러요. 그래서 가족 단위 손님들을 자주 봐요. 아버지 세대는 ‘추억의 팝송’이나 시집 등 옛날 책들을 기념으로 사 가요. 자녀들을 위해 세계명작 시리즈나 한국 전래동화 책들도 사 갑니다.” ―박기봉 씨(67·부산 남해서점 주인)

해외 헌책방 현황


“책을 좋아해 많이 사는 편이에요. 그런데 호주는 책값이 비싸 헌책방에 자주 갑니다. 희귀한 책이 많아 애용하는 편이죠. 책을 팔 때도 현금으로 받는 것보다 헌책방 쿠폰으로 받으면 판매가의 20% 정도를 더 보상해 주니 이익이에요. 한국과는 다르게 교과서를 팔 땐 학생증을 보여주고 이름을 적어야 하죠.” ―최소영 씨(23·멜버른대 3학년)

“미국 뉴욕엔 고서적이나 희귀본을 취급하는 곳부터 신간의 중고 서적을 파는 서점에 이르기까지 헌책방 종류가 다양해요. 그래서 헌책방에 가면 왠지 모를 흥분이 느껴졌죠.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 등 유명 작가 책들의 초판본이나 사인본도발견할 수 있죠. 이런 책을 직접 만져 보고 읽어 볼 수 있답니다. 그 밖에 헌책을 기증받아 판매한 돈으로 에이즈 환자나 노숙인을 지원하는 헌책방, 서가 길이만 18마일(약 29km)에 이르는 헌책방, 뉴욕 갤러리의 도록이나 소더비 경매 출품작 카탈로그 등을 구해 파는 헌책방 등 제각기 특색이 있답니다.” ―최한샘 씨(36·‘뉴욕의 책방’ 저자)

헌책방, 이래서 좋아요

“헌책방의 가장 큰 매력은 ‘소통’이에요. 깊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갈 때마다 사장님, 단골손님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죠. 서로 아끼는 책을 추천해 주기도 하죠. 지난번엔 한강 작가에 대해 한 시간가량을 얘기했어요. 서로의 신상을 밝히지 않고도 자연스레 대화에 참여할 수 있어 좋아요.” ―김수경 씨(24·연세대 영어영문학과)

“학창 시절 헌책방을 뒤져 성문종합영어와 맨투맨 기본영어를 사서 달달 외우고 공부했어요. 먹고살기 바쁜 시대였던 만큼 집에 책이 거의 없었죠. 하지만 헌책방에 오면 책이 차고 넘쳤죠. 그런 제게 헌책방은 삶의 자양분이나 다름없었답니다. 헌책방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밖에요.” ―김경식 씨(48·교사)

“헌책들 하나하나엔 다 사연이 있어요. 열에 한둘엔 꼭 쪽지나 메모가 발견되죠. 얼마 전엔 신경숙 씨 소설책 앞 장에 ‘○○아, 고맙고 미안해’라고 쓰인 문구를 봤어요. 이 책엔 대체 무슨 사연이 얽혀 있는지 궁금해요.” ―백승연 씨(35·회사원)

“인터넷서점이 운영하는 중고 서점을 애용해요. 유행을 많이 타는 자기계발서나 이야기 구조가 단순한 소설, 여행 가이드북 등 일회성으로 읽는 책을 주로 중고로 구매하죠. 읽고 나서 다시 팔기도 해요. 인터넷서점에서 새 책을 사려다가도 새 책 바로 밑에 가격이 30% 정도는 더 싼 중고 서적이 뜨면 새 책보다는 헌책에 관심이 가요.” ―최윤미 씨(38·회사원)

“경주 한옥 저희 집에 사랑방과 같은 헌책방을 열었어요. 처음엔 환자들에게 제가 읽은 책을 1000원씩에 팔다가 반응이 좋아 제 서재를 개방한 거죠. 10년이 지나도 안 읽을 책이라면 그 책이 더 필요한 분에게 드리고 싶어요. 헌책 판매 수익금은 기부할 예정이랍니다.” ―이상우 씨(38·한의사)
 
오피니언팀 종합
#헌책방#중고 서점#해외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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