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기자의 스포츠 한 장면]죄의식 안겨주는 ‘효자’ 종목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8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이종석 기자
이종석 기자
일본은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금메달 목표를 14개로 잡았다. 4년 전 런던 올림픽 때의 2배다. 일본은 런던 대회에서 역대 최다인 38개의 메달을 땄다. 하지만 금메달은 7개에 그쳤다. 28개의 메달을 딴 한국은 금메달이 13개였다. 일본은 런던 대회에서 유도가 부진했다. 유도 종주국 일본은 남녀 7개 체급씩 모두 14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던 유도에서 금메달을 한 개밖에 따지 못했다. 남자는 노골드였다. 일본 남자 유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딴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리우 올림픽 일본 선수단의 총감독을 맡은 다카다 유지는 며칠 전 목표치를 밝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런던에서 금메달 하나 없이 참패했던 ‘오이에게(お家芸)’ 남자 유도의 부활에 희망을 건다.”

‘오이에게.’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특출한 재주나 기술을 가리키는 일본말이다. 일본의 전통 공연 가부키 용어에서 나온 ‘주하치반(十八番·18번)’과 비슷한 의미다. ‘주하치반’은 가부키 최고의 배우로 꼽힌 이치카와 단주로 집안에 전해 내려온 대표작 18편을 일컫던 말인데 ‘가장 뛰어난 장기’란 뜻이다. ‘오이에게’가 스포츠 종목 앞에 따라 붙어 ‘전통적으로 강한 종목’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일본은 유도나 기계체조 같은 종목이 올림픽에서 ‘오이에게’다. 우리로 치면 ‘메달밭’ ‘효자 종목’ 정도로 보면 된다.

독자한테서 메일이 왔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효자 종목이 아닌 종목은 뭐가 되는 거냐? 메달을 많이 따는 종목에 관심이 더 많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효자 종목’은 좀 아닌 것 같다.” 좀 더 설명하면 이런 얘기다. 우리나라는 여름 올림픽 때마다 적어도 200명이 넘는 국가대표가 출전한다. 그래도 메달은 많아야 30개 안팎이다. 메달 많이 딴다고 ‘효자 종목’이라 부르면 메달 못 딴 종목은 효자가 아니라는 얘기인데…. 그럼 불효 종목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독자는 얼마 전 필자가 쓴 양궁 국가대표에 관한 기사를 본 모양이다. ‘양궁은 대표적인 올림픽 효자 종목’이라는 표현이 기사에 나온다.

‘양궁이 효자 종목이라고 했지, 내가 언제 메달 못 딴 종목을 불효라고 했나…’ 싶다가도 얼토당토않은 얘기는 또 아닌 것 같았다. 런던 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대한핸드볼협회 임원이 이런 얘기를 했다. “효자 종목, 효자 종목 소리 듣다가 메달을 못 따니까 선수들이 무슨 잘못이나 한 것처럼 기가 죽어서….”

핸드볼이 어떤 종목인가.

한국이 올림픽 단체 종목에서 첫 금메달을 딴 게 여자 핸드볼이다. 여자 핸드볼은 올림픽에 처음 나간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대회부터 2008년 베이징 대회까지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땄다. 올림픽 때마다 효자 종목으로 거론됐다. 그러다 4년 전 런던에서는 4위를 해 빈손으로 돌아왔다. 효자 종목 소리를 들을 때는 별생각이 없다가 메달을 못 따고 보니 ‘이제는 효자 종목이 아닌 건가. 올림픽 때도 관심 밖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게 임원의 말이었다. 선생님이 공부 잘한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는 별일 아닌 듯 여겼는데 같은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자니 그렇지가 않더라는 얘기다.

한국의 양궁 같은 종목이 중국에도 있다. 탁구와 다이빙이다. 탁구가 올림픽 종목이 된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28개의 금메달 중 24개를 중국이 쓸어갔다. 중국에서는 탁구나 다이빙 앞에 ‘우세항목(優勢項目)’이란 말을 붙인다. 드물게는 ‘탈관항목(奪冠項目)’이라는 말도 쓴다. 탈관은 ‘우승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중국에 효자가 없어 ‘효자 종목’ 같은 말을 안 쓰기야 하겠나. 일본도 마찬가지다. 영어권 국가 대부분은 ‘도미넌트(dominant·우세한)’를 종목 이름에 붙여 쓴다.

‘효자 종목’이란 말이 정확히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짐작하기로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제법 따기 시작한 서울 올림픽 후의 일이 아닐까 싶다. “너도 여태껏 써 놓고 이제 와서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무심하게 썼다. 그러다 ‘그것 좀 이상하지 않으냐’ 하는 얘기를 들었다. 일리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주변에 물어봐도 “뭘 그런 것까지 시비를 다 거느냐” 하는 반응보다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라는 의견이 더 많다. 다른 말이 아예 없으면 모를까, 메달 좀 더 따고 덜 따고 한 일에 효자 어쩌고 할 필요까지 있겠나 싶다. 그래서 앞으로 ‘효자 종목’이란 말은 그만 쓸까 한다. 나 혼자 안 쓴다고 당장 뭐가 달라지기야 할까마는…. 그래도.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효자 종목#메달#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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