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백제 정지산 유적 〓 빈전’ 무령왕릉 지석으로 풀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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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공주 정지산 유적 발굴한 이한상 대전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11일 충남 공주시 정지산 백제 유적을 다시 찾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정지산 유적 내 중심 건물인 기와건물터로, 통나무 기둥들은 재현품이다. 이곳에 무령왕비의 시신이 2년 3개월 동안 안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이한상 대전대 교수가 11일 충남 공주시 정지산 백제 유적을 다시 찾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정지산 유적 내 중심 건물인 기와건물터로, 통나무 기둥들은 재현품이다. 이곳에 무령왕비의 시신이 2년 3개월 동안 안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초석(礎石·주춧돌)도 없는 건물에 연꽃무늬 기와라니….”

1996년 8월 충남 공주시 정지산 유적 발굴 현장. 그해 발굴에 착수한 지 6개월 만에 연꽃무늬 수막새를 발견한 이한상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49·현 대전대 교수)는 ‘대박’ 예감과 함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연꽃무늬 기와가 출토되는 삼국시대 건물터는 십중팔구 궁궐 혹은 격이 높은 사찰. 당시 무거운 기와를 버티려면 기둥 아래 초석이나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을 놓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초석이나 적심이 전혀 나오지 않는 대신 바깥부터 안쪽까지 기둥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기둥이 너무 많아 사람이 거주하기 불편할 정도였다. 궁금증은 갈수록 커졌다. ‘도대체 이 건물의 기능은 무엇인가….’

미스터리를 풀 열쇠는 인근 무령왕릉 안에 있었다. 20년 만에 정지산에 오른 그는 “발굴 한 해 전 무령왕릉 내부를 실측한 경험이 중요한 힌트가 됐다”고 회고했다.

○ 무령왕릉 지석에 담긴 실마리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무령왕릉 지석(가운데 사진)의 내용대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삼고 서쪽으로 선을 그어 정지산 유적이 백제시대 빈전임을 알아냈다(위). 이곳에서는 궁궐이나 거대 사찰에서 주로 발견되는 연화무늬 수막새 (아래)가 나왔다. 이한상 교수·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무령왕릉 지석(가운데 사진)의 내용대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삼고 서쪽으로 선을 그어 정지산 유적이 백제시대 빈전임을 알아냈다(위). 이곳에서는 궁궐이나 거대 사찰에서 주로 발견되는 연화무늬 수막새 (아래)가 나왔다. 이한상 교수·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병오년(서기 526년) 12월 백제국 왕태비(무령왕비)께서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르고 기유년(529년) 2월 12일 다시 대묘로 옮겨 장사를 지내며 기록한다(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太妃壽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未朔十二日甲午 改葬還大墓 立志如左).’

무령왕릉에서는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묻힌 사람의 이름과 사망일이 새겨진 지석(誌石)이 발견됐다. 여기서 나온 지석 2개 중 한 면에 무령왕비가 죽은 해와 빈전(殯殿·시신을 입관한 뒤 매장하기 전까지 안치하는 곳)의 위치, 남편 무령왕과 합장된 날짜가 기록돼 있다. 백제의 경우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2년 3개월 동안 시신을 빈전에 모시고 상례를 치른 뒤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한상은 이 중 ‘서쪽 땅에서 장례를 치렀다(居喪在酉地)’는 문장에 주목했다. 다른 지석에 방위표가 그려진 걸 감안할 때 이것은 빈전의 위치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임에 틀림없었다. 기준점인 왕궁 위치는 지석 다른 면에 새겨진 매지권(買地券·죽은 사람이 땅 신으로부터 묻힐 땅을 사들인 증서) 문장을 통해 공산성(公山城)으로 추정했다. 이한상은 지도에 무령왕릉과 공산성(왕궁)을 직선으로 연결한 뒤 다시 공산성을 꼭짓점으로 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서쪽)으로 직선을 그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정지산에 선이 닿았다. 정지산 유적이 백제 무령왕비의 빈전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로써 초석이나 적심이 없는 연꽃무늬 기와 건물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시신을 안치하는 장소이니만큼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 정도로 내부에 기둥이 빼곡해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제기(祭器)로 주로 쓰이는 ‘장고형(長鼓形) 기대(器臺)’ 조각이 여럿 출토된 것도 빈전일 가능성을 높여줬다.

이한상은 이듬해 열린 전국역사학대회에 정지산 유적을 빈전으로 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일부 회의론도 있었지만 학계 다수는 이를 지지했고, 정지산 유적은 2006년 국가사적으로 승격됐다. 특히 오다 후지오(小田富士雄) 후쿠오카(福岡)대 교수 등 일본 학계의 관심이 뜨거웠다. 정지산 유적에서 기와건물터와 함께 발굴된 대벽(大辟)건물터가 일본의 그것과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대벽건물터는 사각형으로 도랑을 판 뒤 그 위에 나무기둥을 촘촘히 박아 벽을 세운 것이다. 이한상은 “정지산 유적의 대벽건물터는 시신이 안치된 기와건물터와 품(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어 다분히 기획성이 엿보인다”고 분석했다.

○ 학계 “백제 3년상 고고 자료로 실증”


고고학계는 정지산 유적이 삼국시대 빈전을 확인한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한다. 궁궐 안 빈전에서 5∼7일만 장례를 거행한 중국과 달리 3년상을 치른 고대 한반도의 장의 풍습을 고고 자료로 실증했다는 것이다. 3년상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에까지 전해졌다. 일본서기에는 일본 조메이(舒明) 천황이 죽은 뒤 ‘백제대빈(百濟大殯·백제의 3년상)’을 따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백제와 일본 왕실이 상장의례를 공유한 것은 양국 문화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며 “정지산 유적 발굴은 대벽건물터가 일본으로 전파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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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백제 정지산 유적#무령왕릉 지석#이한상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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