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 정부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공감’입니다. 국민의 요구는 굉장히 다이내믹해졌는데, 예측 가능성은 크게 줄었어요. 감성적 요소도 중요하죠. 무더위가 아니었다면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이 이렇게까지 커졌을까요.” 재정학 교수로 33년을 살아온 오연천 울산대 총장(65)이 현대 정부의 위기를 경고했다. 경직되고 정체된 과거의 정부 시스템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전기요금 폭탄’을 걱정하는 여론이 들끓는데도 “에어컨을 합리적으로 쓰라”고 조언하는 정책 감각으로는 민심을 따라잡기 어렵다는 말처럼 들렸다. 오 총장은 “국민의 요구에 얼마나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과 탄력을 갖고 있느냐가 현대 정부의 경쟁력”이라고 강조한다. 최근에는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서울대와 울산대 총장으로 일하면서 경험한 51개 의사결정 사례를 분석한 책 ‘결정의 미학’도 출간했다. 그를 지난달 말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동아미디어센터 회의실에서 만났다. 》
―리더의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중 하나가 인사입니다.
“인사는 정무적 인사인 ‘엽관제(獵官制)’와 능력주의가 결합된 것입니다.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뛴 팀들이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해요. 그걸 ‘낙하산 인사’라고 폄하해선 안 됩니다. ‘낙하산 인사를 안 하겠다’는 말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요. 다만, 정무적 인사를 하되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을 쓰겠다고 하면 됩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앉히니 낙하산 인사 논란이 생기는 것 아닌가요.
“대통령이 되면 수백, 수천 명의 공직자에 대한 인사권을 갖게 돼요. 대선이 12월이고, 이듬해 2월 말이면 정부가 출범하잖아요. 대통령이 ‘마법사’도 아니고 제한된 정보와 시간 속에서 이들의 역량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새 정부가 들어서고 서너 달간 인사 공백을 겪고 자질 논란이 생깁니다.”
―당장 내년과 후년이 그런 상황인데….
“대통령 당선부터 취임 때까지 약 두 달간이 중요합니다. 이때 대통령 당선자가 제대로 된 인사를 준비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지금은 대통령에 취임해야 인사검증 시스템을 쓸 수 있어 이 부분이 매우 취약합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정무직 인사를 검증하고 추천받을 수 있는 법적 시스템부터 마련해야 합니다.”
―얼마 전 퇴임한 존 헤너시 미국 스탠퍼드대 총장이 16년간 재임했습니다. 한국 대학의 총장이나 기관장이 너무 자주 바뀌는 것 아닌가요.(참고로 1891년 설립된 스탠퍼드대 총장은 11명밖에 없다. 평균 11년씩 일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기관장, 책임자의 임기에 상당히 각박합니다. 중장기 연구를 담당하는 국책연구원장 임기도 3년입니다. 장관도 조금만 하면 ‘장수 장관’이라고 하잖아요. 자연계 등 국책연구원장은 더 오래 일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승계 시스템’도 중요합니다. 2인자나 3인자였던 사람이 충분히 트레이닝을 받고 리더가 돼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게 하는 승계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전임자가 했던 걸 다 뒤집어 버리기도 합니다.
“장관 되고, 총장이 되면 당장 ‘당신의 오리지널한 정책은 뭐요?’ 하고 물어요. 대학의 비전은 우수 인재를 양성하고 연구 잘해서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건데, 새 총장이 온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니죠. 승계된 정책과 새로운 정책이 잘 결합돼야 합니다. 그걸 우리 사회의 소프트웨어 역량이라고 봅니다.”
―정부도 마찬가진데요.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새로 한다고 하는 일 중 간판만 바꿔 다는 식의 ‘신장개업’도 많습니다. 과거 어느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새로운 일에 쓸 수 있는 예산이 1%도 안 되더라’라고 하시더군요. 공공정책의 대부분이 계속 사업에 대한 것이고, 새 정부가 5∼10% 정도나 바꿀 수 있을 뿐입니다.” 대선 1년후 ‘공약고백’ 필요
―그런데도 취임 초 모든 것을 바꿀 것처럼 이야기하지 않나요.
“대선 과정에서 공약을 쏟아냈으니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그래요. 취임 1년 정도 지나면 이를 공론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봐요. ‘후보자 시절에 이것저것 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해보니 아니더라’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거죠. 좀 로맨틱하게 말해 한번 정도는 공약에 대한 ‘고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책임한 공약이 남발되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선거 때 국민들이 공약을 선별할 역량을 가져야 합니다. 새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을 검증하고 한계를 인식하는 관찰이 필요한 겁니다. 공약을 하는 사람도 기회비용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2009년 산업은행에서 정책금융공사를 분리한 결정에 대해 ‘개혁 주도세력이 모노레일적 발상으로 끌고 갔다’고 비판했는데….
“정권 초엔 선거에서 많은 조언을 해주신 분들의 목소리가 반영됩니다. 그들이 산업은행에서 정책금융을 떼어내고 대형 투자은행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시장의 자율적인 힘이 아니라 정부의 공권력으로 거대 금융기업을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허심탄회하게 계급장 떼고 얘기했다면 더 나은 정책안이 나왔을 겁니다. 산업은행 문제는 관료적 합리성으로 충분히 걸러낼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듭니다.”
오 총장은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위원장이던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위원으로 공기업 선진화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남들은 굉장한 감투를 쓴 것처럼 얘기하지만, 전공이 재정학이고 공기업 관련 일을 오래 해왔기 때문에 참여한 것이지 개혁을 주도한 게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4년 만인 2013년 산업은행과 한국정책금융공사를 다시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서두르다 실패한 매각
―당시 인천국제공항 지분 49%를 해외에 매각하는 방안도 무산됐습니다.
“언론에서 알토란 같은 공항을 팔아먹는다고 했어요. 그게 아니거든요. 51%의 지분을 갖고 있으면 우리 것이죠. 공항은 원래 지분을 갖고 전략적 제휴를 합니다. 인천공항공사가 싱가포르, 독일 프랑크푸르트, 호주 시드니 등과 손을 잡고 해외에 진출하고 도약할 수 있는 아이디어인데 무산돼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분 매각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나온 얘깁니다. 이명박 정부가 친기업적이기 때문에 특혜를 준다는 확대해석이 생긴 겁니다. 어떤 국회의원은 저를 ‘매각 삼인방’의 하나로 지목하기도 했어요. 이런 일을 출범 1년도 안 된 새 정부가 서둘러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장관, 총리, 대통령이 대중 앞에 나와 1문1답 토론이라도 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설득했어야 합니다. 일본의 우정개혁이 그래서 성공했습니다. 총리와 내각 대신 등이 수백 회의 토론을 거쳤어요. 3년간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죠.”
‘고이즈미 구조개혁’의 설계자로 불렸던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게이오대 교수는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시절 금융·경제재정정책담당상 등을 지내며 우정성 민영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오 총장은 그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우정개혁 사례 등을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대 총장 선거 과정에서 교원 보수 인상을 내걸어 포퓰리즘 비판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서울대 교원의 보수가 유수 사립대의 한 70% 정도이므로 차이를 줄여야 한다는 원칙과 중장기적 계획을 언급한 것이 선거 유인물에 ‘보수 인상’이라는 제목으로 뽑혀 제작됐어요. 국립대 교수 봉급은 서울대 구성원이 아니라 국회의 예산 심의에 따라 이뤄지는데도 재정학자인 제가 그것을 인상하겠다는 공약을 언급한 건 부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공약팀에서 강력하게 보수 인상을 주장했는데, 이것을 끝까지 반대하지 못했어요. 당선되는 데 유리한 공약이라는 유혹을 더 과감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대선 전 복지 공론화해야
―내년 대선에 복지 공약이 쏟아져 나올 테고 포퓰리즘 논란도 커질 텐데요.
“복지를 놓고 국가와 개인의 책임이 시소처럼 왔다갔다 움직이는 게 문제입니다. 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역량에 맞게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복지의 영역을 정의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범국민적 기구를 대선 전에 만들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늘어나는 복지 재원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도 문제입니다.
“가진 사람들이 더 부담하려면 공감대가 있어야 해요. 대선 전에 전국을 돌며 토론회라도 열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선거 때 가이드라인이라도 생기는 거 아닌가요. 경제적 여유계층이 얼마나 더 부담해야 할지 원칙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부담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존경도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공감과 동참이 나오는 겁니다. 적극적 복지의 규모와 구조, 조세 부담 등이 논의의 핵심 축입니다.”
그는 노태우 정부 때부터 정치 입문설이나 입각설에 오르내렸다. 정치와 인생의 연결고리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농구 코치가 코칭은 잘해도 한창 뛰는 선수보다 공은 못 넣는 것 아니냐”고 에둘러 말했다. 그는 “대학 총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무적 일을 해야 할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은 대학 직책을 맡은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라며 “조언이나 대화에 응하는 것은 몰라도 정치적 결정의 주체가 되는 부분에선 한계가 있다”고 했다. 당장은 울산대를 지역 거점 대학에서 아시아 중심 대학으로 성장시키는 일이 더 급해 보였다.
:: 오 총장은 ::
△1951년 충남 공주 출생 △1974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1982년 미국 뉴욕대 석사 및 박사(재정관리) △1975년 행정고시 합격 △1983∼2010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2010∼2014년 서울대 제25대 총장 △2011∼2014년 서울대 초대 이사장 △2015∼ 울산대 제10대 총장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