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국은행이 내년 경제성장률을 2.8%로 내렸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한발 더 나아가 “내년 성장률이 잠재성장률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라며 잠재성장률이 2%대로 떨어졌음을 처음으로 시인했다. 2%대 성장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경제의 기초 체력이 허약해졌다는 것이다. 일본처럼 부자 나라가 되기도 전에 저성장 고령화 시대에 진입한 한국 경제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한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 김준경 원장(60)을 최근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동아미디어센터 회의실에서 만났다. 김 원장도 “구조개혁이 지연돼 생산성 부진이 계속된다면 잠재성장률이 3.0%를 밑돌 수 있다”며 “10년 후 잠재성장률이 1%대로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성장-물가-생산성 3저(低) 위기”
―내년 경제 어떻게 보십니까.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와 내년 세계 경제성장률을 각각 0.1%포인트 낮췄어요. KDI가 5월 전망했을 때보다 여건이 더 나빠진 겁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저물가, 저생산성’이 세계 경제의 특징인데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전 세계 국가들이 구조조정을 게을리해 부채만 잔뜩 늘었습니다. 선진국은 정부 부채, 중국은 기업 부채, 한국은 가계 부채가 많이 증가했습니다.”
김 원장은 “한국 경제는 대외 의존도가 높아 안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KDI도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할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한국도 부채가 많이 늘었는데요.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성장을 제약하는 부채의 임계치는 가계 부채의 경우 국내총생산(GDP)의 85%, 기업 부채는 90%, 정부 부채는 85%입니다. 한국의 기업 부채는 106%로 임계치를 이미 넘었죠. 가계 부채는 85∼90%로 임계치에 이르렀습니다. 정부 부채만 40% 약간 넘어 여유가 있지만, 고령화 등으로 재정 상황은 곧 어려워질 것입니다.”
―특히 잠재성장률이 2%대로 떨어진 게 걱정입니다.
“지난 5년간 한국의 잠재성장률(3.1%)에 대한 생산성 기여도가 과거의 절반 수준인 0.8%포인트로 떨어졌습니다. 기업 퇴출 장벽, 진입 규제 등 비효율의 적폐가 저생산성을 초래한 것입니다. 구조 개혁이 시급합니다.”
―당장 기업 구조조정이 큰 현안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과잉투자로 기업 부채가 많았습니다. 출자전환 등 부채 구조조정으로 문제를 해소했죠. 이번엔 재무적 문제 외에 사업상 문제까지 생겼습니다.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기업 매출액 증가율이 2년 연속 마이너스를 보일 정도로 영업력이 훼손됐어요. 사상 최저 금리라는데,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기업이 많습니다. 재무 구조조정과 함께 사업 구조의 재편이 없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조선업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데요. 쉽지 않습니다.
“일본의 경험을 배워야 해요. 일본이 조선업을 너무 빨리 포기해 실패했다고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렇지 않았어요. 일본은 1970, 80년대 1, 2차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두 차례 조선업 구조조정을 해 설비는 50%, 조선업 종사자는 1974년 27만 명에서 1988년 8만 명으로 줄였습니다. 영국은 1977년 선박공사를 세워 131개 조선사를 국유화하고 1978년부터 10년간 13억 파운드의 보조금까지 줬죠. 노조 반대가 거세니 그렇게 한 것인데, 회생에 실패했습니다. 결국 재정에 큰 부담만 남겼어요.”
KDI 연구팀은 8월 조선업 구조조정 방안을 배우기 위해 영국 스웨덴 일본 등을 돌았다. 김 원장도 직접 영국을 방문했다.
“부실기업 정리기구, 실업대책 배워야”
―일본에서 뭘 배워야 합니까.
“일본은 조선업 구조조정을 위해 주무부처인 운수성에 업계와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자문기구인 ‘해운조선합리화심의회’를 만들었습니다. 심의회가 세계 시장 전망 등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내놨고,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공적자금을 조성해 설비와 고용을 성공적으로 줄였습니다. 우리도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인 산업관계장관회의 밑에 일본의 심의회와 같은 전문기구를 둘 필요가 있어요.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석유 화학 철강은 물론 자동차 산업도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 있어요. 조선업의 구조조정이 중요한 선례가 될 것입니다.”
김 원장은 “부실기업과 부실채권 정리를 목표로 하는 ‘해결기구(resolution authority)’를 설치해 구조조정의 추진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구조조정의 성패가 실업대책에 달려 있다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영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는 특정 지역에 조선소가 집중돼 대량실업이 발생하면 지역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훨씬 큽니다. 일본은 조선업 구조조정을 위해 ‘고용조정 지원금’ ‘고용 안정자금’ ‘직업전환 지원금’ 등의 고용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1977년 ‘특정 불황업종 이직자 임시조치법’을 제정하고 40세 이상 실업자에 대해 실업보험과 취업촉진수당을 최장 3년까지 줬어요. 일본은 요코하마의 조선소를 없애고 야외 음악장을 만들었고 조선업이 쇠퇴한 가와사키는 환경도시로 바꿔 놨습니다. 전직과 재취업 등 실업 대책과 도심 재생 계획을 함께 진행한 겁니다. 우리도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선업 근로자 해외 진출 지원 필요”
―불황 속에 재취업이 쉽지 않을 텐데요.
“영국 뉴캐슬의 버려진 조선소를 방문했을 때 ‘이곳 근로자들이 다 어디에 갔느냐’고 물었더니 절반 정도가 네덜란드 캐나다 중동 등에 재취업했다고 하더군요.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 조선업은 불황이지만 국내 발주 물량이 전체 일감의 80% 정도 되는 일본은 오히려 사람이 부족하다고 해요. 정부가 조선업 실직자들에게 일본어 교육 등을 해주고 일본 취업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면 어떨까요. 한국과 일본 당국이 협력하면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선업 회생을 위해 군함 발주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시간을 벌려면 ‘일감 절벽’을 버틸 수 있는 수요 창출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안보 위기에도 대응하는 해군력 강화를 위해 군함 건조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재원 마련과 형평성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군함 건조 재원은 재정지출 사업 효율화와 국방 조달체계 쇄신을 통해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일본은 순시선을, 영국은 전투함은 물론이고 항공모함 건조까지 추진했어요. 이를 통해 조선업을 사업지원 서비스로 전환했죠. 호주도 최근 조선업 불황에 대응해 군함, 잠수함 건조에 20년간 약 80조 원을 투입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KDI 연구팀은 영국 뉴캐슬대에서 1970, 80년대 조선업 구조조정 관련 영국 국방부 자료를 입수했다. 이 자료엔 ‘조선업 위기에 대한 대처뿐 아니라 해군력 강화 및 군수장비 고도화를 위해 3개 조선소에 군함을 발주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2011년 이후 국민총소득 증가율보다 가계신용 증가율이 더 높아졌습니다. 이 차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부채 총량을 관리해야 할 때입니다. 영국처럼 은행의 고위험 대출 비중에 대한 상한선을 두는 방안도 검토해야 합니다. 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은 가계부채 증가세 억제를 위해 현 수준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야당은 법인세 인상을 주장하는데….
“법인세는 국가와 기업의 국제 경쟁력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KDI 연구에 따르면 법인세 평균 실효세율이 1%포인트 하락하면 상장기업 투자율이 0.2%포인트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09년 법인세 인하 후 투자가 늘지 않았습니다.
“세계적으로 투자가 둔화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법인세율 인하가 없었다면 투자가 더 위축됐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법인세를 올리면 부담이 소비자와 근로자에게 전가될 가능성도 큽니다.”
―그렇다면 고령화에 따른 복지 재원은 어디서 마련해야 합니까.
“넓은 세원 낮은 세율 원칙에 따라 세금 공제 제도를 줄여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중산층 이하의 세금 부담이 늘어날 수 있어 고소득자에 대한 최고 세율을 올리는 방안도 일리가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1977년 도입된 부가가치세 인상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부가세 인상은 서민에게 더 부담이 됩니다.
“부가세 인상으로 마련한 재원을 고령화 관련 복지 지출에만 쓰도록 한다면 소득 분배를 개선할 수 있을 겁니다. 당장 올리자는 게 아니라 장기 과제로 놓고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자는 겁니다. 내년 대선 후보들이 부가세 인상 논의를 시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년 대선의 핵심 어젠다는 무엇이 돼야 합니까.
“고령화와 4차 산업혁명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면 규제, 노동, 교육 개혁이 대선의 핵심 어젠다가 돼야 합니다. 미국처럼 기술기업이 혁신을 시도하도록 기회를 부여하고 사후에 허가를 받도록 하는 ‘Wait and See(지켜보기)’ 방식의 규제 시스템을 도입해야 합니다. 의원 입법에 대한 규제 영향 평가도 필요합니다. 근로자의 이직과 전직이 원활해지려면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직무 및 성과급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교육 개혁도 강조했는데….
“1960년대 중학교 입시에서 정답이 두 개여서 소송을 내고 추가 합격자를 뽑은 ‘무즙 파동’이 있었어요. 50년 이상 지났는데도 교육 현장에서는 아직도 정답 찾는 일만 하고 있어요.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인력을 양성하려면 교육 개혁, 토론식 수업 방식으로의 변화가 시급합니다.”
▼ 김준경 KDI 원장은 ▼
△1956년 서울 출생 △1975년 경기고 졸업 △1980년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졸업 △1988년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석사, 박사 △1988∼1990년 미국 버지니아폴리테크닉주립대 교수 △2006∼2007년 KDI 부원장 △2008년 대통령경제2(금융)비서관 △2013년 5월∼현재 KDI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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