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남서부 홍해에 붙어 있는 항구도시 지다. 이슬람 성지 메카의 외항이자 사우디 제1의 상업도시이지만 국내 건설업계에선 중동지역이 국내 업체의 텃밭이 되는 데 결정적인 단초가 만들어진 곳으로 더 유명하다.
사우디 정부는 1974년 9월 지다 시 미화공사를 한국 업체 ‘삼환’에 맡긴 뒤 지다 공항에서 메카 쪽으로 향하는 2km 길이의 도로확장 공사를 40일 이내에 끝낼 것을 주문했다. 이에 삼환은 ‘8시간 3교대 24시간 작업’을 벌인다. 이 과정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현장에서 야간작업을 위해 매일 수백 개의 횃불이 동원됐다. 깜깜한 어둠 속에 늘어선 횃불은 불꽃군무를 방불케 하는 장관을 이뤘다. 우연히 이를 목격하고 큰 감명을 받은 사우디 국왕은 한국 업체에 추가 공사를 주도록 명했다. 이를 계기로 중동지역에 ‘꼬리(코리아의 현지 발음)’ 열풍이 불었다. 이른바 ‘불야성의 횃불작업’이다.
이후 중동지역은 국내 건설업계의 안방이 됐다. 특히 사우디는 전략적인 요충지가 됐다. 이를 뒷받침할 지표가 해외공사 수주액이다. 국내 건설사들이 해외에 처음 진출한 1965년 이후 20일까지 가장 많은 공사를 따낸 곳이 사우디다. 총수주액만 1384억 달러로 전체 해외건설 수주액(7535억 달러)의 18%나 된다. 국내 업체들이 한 번이라도 공사를 수주한 나라가 전 세계 150곳인 점을 감안하면 사우디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이런 관계에 이상기류가 나타났다. 2015년 왕위에 오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이 처음으로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지난달 26일부터 한 달 일정으로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등 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오르면서 한국을 제외한 것이다. 게다가 살만 국왕은 12일 방문한 일본에선 세계 최대 규모의 해수담수화 사업 진행과 일본 기업을 위한 경제특구 설치 등을 담은 ‘양국 간 경제협력 방안(일-사우디 비전 2030)’에 합의했다. 15일 중국에선 650억 달러 규모의 경제협력을 체결하고, 말레이시아에선 70억 달러 투자를 약속하는 등 방문국마다 적잖은 선물 보따리를 내놨다. 아쉬운 건 살만 국왕이 이번 순방길에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했지만 국내 준비 부족으로 무산됐다는 점이다. 정부 산하 기관의 한 관계자는 “국왕을 초청하려면 정상회담을 준비해야 하는데 국내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 부처의 한 관계자는 “2015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우디를 방문해 살만 국왕과 면담을 했고, 현재 후속 실무자 접촉을 진행 중이다”며 한국과 사우디가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강조했지만 뒷맛은 개운치가 않다. 국정 공백 장기화로 예상됐던 경제외교 차질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19일 막을 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도 한국 경제외교의 무기력한 민낯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보호무역 기치를 앞세워 한국을 압박하고 있는 미국을 달랠 기회로 예상됐던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과의 면담은 10분여 만에 성과 없이 끝났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경제 보복과 관련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으로 기대됐던 중국과의 회담은 샤오제(肖捷) 중국 재정부장(재무장관)의 거절로 만남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문제는 5월 9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 때까지 이런 상황이 개선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거칠어져 가는 사드 경제 보복에 보호무역 파고로 지금 한국 경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힌 모양새다. ‘한국 경제의 횃불’이 꺼지지 않도록 민관정 관계자들이 이제라도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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